키보드 자판 위의 활자가 실종된 사건
키보드 자판이 건네는 말
별안간 학생 한 녀석이 품평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노트북을 뚫어져라 관찰하더니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한 듯한 어조로 유레카를 부르짖었다. 아르키메데스도 놀랬겠다. 이 녀석아.
"선생님! 키보드에 E자하고 R자가 지워졌어요!!!"
맥락도 건너뛰고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나 싶어 노트북 자판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헉, 학생 말마따나 E자와 R자의 5시 방향 프린팅이 사이좋게 벗겨져 각각 F와 P로 위장하고 있었다. 아마 키보드 자판 주인이 독수리 타법을 구사하는 사람이었다면 끔찍한 재난이었을 상황이다. 일찍이 독수리 둥지를 빠져나온 나는 모니터에만 편애 섞인 눈길을 쏟고 키보드 자판의 구애는 외면을 해왔던 터라 여태껏 키보드 자판 글자가 지워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실종된 글자는 비단 E와 R뿐만이 아니었다. S나 D 등 사라진 글자는 꽤 있었다.
키보드 자판 글자가 군데군데 지워진 사실을 인지한 순간, 피부에 와닿아 스러지는 한 송이 연약한 눈꽃처럼 사소한 상실감이 나의 마음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하지만 E와 R을 잃었다고 해서 타이핑을 하는데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내 손가락과 키보드 자판은 각자의 시냅스를 뻗어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맺은 지 여러 해가 지났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정보든 주관적인 사상이든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으면 둔탁하지만 중독성 있는 난타 연주가 시작되고, 연주에 동원된 글자들은 악보의 음표처럼 질서 정연하게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박힌다. 자판이 지워졌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만큼 손가락 열 개는 나름의 숙련된 분업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누르고 싶은 자판 위치를 눈감고도 잘만 찾아가서 적당한 압력을 행사한다.
그동안 키보드 자판은 몇 천, 몇 만 번의 두들김과 마찰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던 것일까? 비록 프린팅이 벗겨지긴 했어도 각 자판의 본질이 변했다고는 할 수 없다. 각자의 위치에 굳건히 버티고 있으면서 자판에 가해진 압력만큼 자신의 본질을 화면으로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키보드 자판처럼 표면이 닳았다고 해서 우리 인생의 본질까지 닳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닳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향해 닿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래저래 생각이 깊어질 때쯤, 키보드 자판이 내 어깨를 다독이며 나지막하게 말을 건네온다.
"내가 사라져 가는 게 슬퍼?"
"슬픔이 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뭔가 허전한 건 사실이야."
"네가 그렇게 밤낮으로 두들겨 대는 데 내가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잖아. 어차피 언젠간 지워질 운명이었어. 자책하지 마."
"미안해, 진작에 자판 덮개라도 씌워줄 걸 그랬어. 너를 소홀히 대한 거 같아."
"그런 말 하지 마. 자판 덮개를 씌웠다면 너의 감촉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을 거야. 그동안 나에게 닿았던 너의 손가락 감촉은 너무 포근했거든. 열심을 다해 일하는 너의 치열함과 열성을 다해 글을 써나가는 너의 부끄러운 꿈 자락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어. 날 위한다면 지금껏 해 오던 대로 최선을 다해 일하고 부지런히 글을 쓰면 돼. 네 인생의 완성을 위해선 난 얼마든지 닳아져도 괜찮아. 그리고 사라져도 괜찮아. 난 네 삶과 꿈 안에 뚜렷한 활자와 의미로 영원히 존재할 테니까. 난 닳아 없어졌지만 넌 완성에 닿아 가고 있잖아. 난 그거면 족해. 그게 나의 존재 이유였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