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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같은 강의를 듣던 여자 후배와
강의가 끝나고 나란히 학과실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 후배는 자기와 걸어가는 이 선배에게서
이성적인 매력을 못 느꼈을까.
후배는 무심결에 몇 마디를 던졌다.
"오빤 왠지 결혼은 할 것 같은데 연애는 죽어도 못할 것 같아."
생각하기에 따라선 저격성 발언일 수도 있어
보통 사람이라면 화가 치밀어 오를 법도 하지만
동글동글한 성격 탓에 나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하지만 내 마음은
후배의 입에서 나온 녹슨 못을
마음에 피가 고일 때까지 계속 곱씹고 있었다.
나의 외모가 문제였을까.
나의 인성이 문제였을까.
결혼할 자격과 연애할 자격은
어떤 분별점이 있는 것일까.
고민이 깊어질수록
나는 연애불능자일지도 모른다는 자학적 예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스스로를 연애무능력자라고 확정했는지
이성과 자발적인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성과의 만남과 사귐에는
모범 답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스스로
사랑학 개론 강의에
F 학점을 매겼다.
대학생 이현기는 그렇게 청춘의 사랑에 낙제했다.
연애를 자주 해봐야
시행착오란 걸 많이 겪게 되어
인생의 마지막 여자에겐 온전한 사랑을 쏟을 수 있다는
한 연애 고수 선배의 말은
나에겐 절대 적용될 리 없는 헛소리쯤이라 간주되었다.
연애를 해 봐야 시행착오도 겪어 보지 원.
연애무능력자라는 자발적 인식은
어느새 결혼무능력자라는 범위까지 생각이 확장되어
나는 이성이란 존재가 감히 틈탈 수 없는
외딴섬에 홀로 갇혀 버렸다.
다른 배가 정박할 마땅한 선착장 하나 없는
고립의 무인도.
'제 발로 들어간 무인도 생활은 진정 행복해?'
여러 배가 우연히 무인도 근처를 스칠 때마다
굳이 구조의 불을 피우지 않았다.
나 같은 건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가라며
누워있던 해먹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덧
대학 시절 그 여자 후배의 말대로
진짜 연애무능력자가 되어 버렸다.
오직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낸 위대한 성과 중의 하나다.
대기에 미스트를 뿌리듯 가랑비가 흩날리는 토요일 오전, 지인이 주선한 소개팅 자리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 소개팅에 나가는 적정 연령에 대한 표준 매뉴얼은 없지만, 나는 이십 대의 끝자락에서야 처음 소개팅 자리에 나가봤다. 새로이 만나는 낯선 여성에게 어떤 말과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없었던 연애의 젬병은 연애백서를 벼락치기하는 대신, 취미 삼아 배우고 있던 마술로 여성의 환심을 사리라 맘먹었다. 그 당시 나란 존재는 꽤 어리숙했었나 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마술 시연이라니...
평소 잘 이용하던 유료 마술 사이트에 접속해서 여성의 시선을 끌만 한 마술 목록을 훑어보던 중 카드 마술 하나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래, 바로 이거야. 궁상맞은 눈물을 머금고 유료 결제를 하니 마술 비법 영상을 클릭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됐다. 기대감으로 뭉친 반죽을 발효시키니 희색이 만면한 설렘의 빵이 부풀어 올랐다. 영상 재생 버튼에 마우스를 갖다 댔다. 그다지 화질이 별로인 영상 안엔 우중충하게 생긴 남성 마술사가 어두침침한 색감의 정장을 갖춰 입고, 인위적으로 만든 세트장에서 묘령의 여성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느끼함을 잔뜩 묻힌 올백 머리의 마술사는 미모의 여성에게 세상 재미없는 언어와 무미건조한 화법, 기계 같은 표정으로 마술을 시연했다. 화들짝 놀라는 척(?) 연기하는 여성의 반응은 미리 명령값이 입력된 소프트웨어처럼 작위성마저 느껴졌다. 이건 뭐 마술 비법 영상이라기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제목은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경계에 서서.'
마술 시연이 끝난 후, 제작진에서 미리 섭외해서 교육시킨 미모의 여성 연기자, 아니 마술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붙잡아 온 여성(이라고 믿고 싶지만)은 아쉽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중충한 남성 마술사가 다시 등장하여 세상 귀찮은 표정과 어눌한 말투로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 듯한 눈초리로 마술 트릭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날 밤 마술사가 알려준 대로 치밀하게 트릭을 제작하고 손에 익을 때까지 연습을 반복했다. 사실 유료 영상 속 마술사가 여성에게 건넸던 멘트들이 있긴 했는데 그건 너무 낯간지러워서 인간의 탈을 쓰고 도저히 똑같이 따라 할 자신이 없었다. 그 멘트 그대로 따라 했더라면 아마 지금의 아내는 내 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술 도중 어설픈 실수라도 했다간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질 것이 뻔했기에 오랜 시간을 들여 절실한 마음으로 마술 기승전결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연습을 반복하니 점차 마술이 자연스러워졌고 소개팅에서 써먹을 세련되고 유머스러운 멘트들도 하나씩 싹을 틔웠다. 약간의 과장을 더하자면 고작 몇 분의 마술을 위해 밤을 꼬박 지새웠다. 이십 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않았나 싶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의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청춘의 잠 못 드는 기억과 설레는 추억.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주제가 '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보잘것없는 남자의 카드 마술 비법'은 아니니 마술의 구체적인 방법 및 과정까진 밝히진 않겠다. 그래도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상대방이 뽑은 카드의 앞면 그림이 순식간에(트릭으로) 지워지고 그림이 사라진 여백엔 네임펜으로 방금 쓴 듯한 손글씨가 짜잔, 하고 나타나는 마술이랄까. 흐릿한 기억이지만 당시 썼던 손글씨를 떠올려 보면,
'저 같은 미남을 가까이서 영접하는 기분은 어떤가요? 막 사귀고 싶죠? 미남을 봤으니 오늘 밥값은 그쪽이 내세요.'
... 가 아니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시네요.'
소개팅 현장의 분위기는 좋았다. 나는 집단 화법보다 개인 화법에 능숙한 인간형인지라 그녀와의 일대일의 만남에서 평소 나답지 않은 언어 센스가 팡팡 터졌다. 분위기에 방점을 찍은 건 야심 차게 준비한 마술이었다. 마술 시연 당시의 장면을 그려보라면 지금도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마술 전과 비교하여 지름 둘레가 1.5배 정도 커진 소개팅녀(전 여자 친구이자 현 아내)의 그로테스크한 동공과 콧구멍, 마술을 성공해 한층 우쭐해진 나의 어깨와 거만이 부푼 눈동자. 우리는 소개팅이 끝나고 몇 달 뒤에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별과 재결합의 숨 막히는 술래잡기 끝에 5년 뒤, 축복의 가랑비가 흩날리는 토요일 오전에 혼인 서약을 주고받았다. 가랑비가 내리던 날 소개팅을 하고 가랑비를 뿌리던 날에 결혼이라니. 왠지 사랑 이야기의 수미상관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런 걸 천생연분, 아니 우(雨)생연분이라고 해야 하나.
신혼 시절의 아내는 내 정장 셔츠를 정성껏 다리면서 소개팅 당시 상황을 수줍게 회고한 적이 있었다. 마술의 신기함을 떠나서 소개팅이란 자리에 무턱대고 나오지 않고 뭔가를 성심껏 준비해 온 순박한 남성의 정성에 감동했다고 말이다. 왠지 나의 외모를 보고 반했다는 말이 나오기를 내심 기대하며 귀를 쫑긋 세우며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끝까지 경청했지만, 안타깝게도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아닌 건 아닌 것이라는 참혹한 사랑의 생태계...
몇 년 전이던가. 학교 일과 시간 중 선생님들 눈을 피해 트럼프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발견하여 현장에서 카드를 압수했다. 분명 졸업할 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녀석들은 나와의 사소한 약속 따위는 가볍게 잊어버리고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교문 밖으로 부리나케 꽁무니를 뺐다. 결국 그 카드는 내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무심한 주인을 기다리며 기약 없이 갇혀 있었다. 근래에 기분 전환도 할 겸 서랍 정리를 하다가 몇 년 전 주인에게 버림 당한 트럼프 카드를 우연찮게 발견했다.
실로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쐰 카드는 케케묵은 헛기침을 몇 차례 하더니 이내 목을 가다듬고 말을 건네온다.
"흠흠, 이게 몇 년만이야. 오랜 기억 속의 카드 마술 마스터."
"에이, 솔직히 마스터까진 아니었지. 그냥 동호회 수준이랄까."
"겸손은... 마술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으니 로또 맞은 거나 다름없잖아."
"그건 인정하지만 마술을 잘했다기보다 나의 지극한 정성과 진심에 아내가 감동한 거지."
"지극한 정성이란 말, 듣기 나쁘지 않은 걸? 맞아. 내 말은 단순히 마술 스킬을 말하는 게 아니었어. 넌 그 당시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을 부렸지. 마술이 아닌 마법 말이야."
"네 말이 맞아. 아내를 만난 건 내 삶에 찾아온 기적이자 마법 같은 순간이었어."
"내 얘길 들어 봐. 누군가가 마술을 펼칠 때 눈을 동그랗게 모으며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뱁새 같은 눈초리로 마술 시연 동작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의심 부호를 날리는 사람도 있어. 마술을 신기해하는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기적을 믿는 유형이지만, 어떻게든 마술의 속임수를 끝까지 캐내려 하는 사람은 기적보단 불가능을 전제로 한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에 의존하는 유형이야. 현실은 현실일 뿐이라며 기적이 현실 속에 출현하는 것을 감히 꿈꾸지 못하는 거지. 대부분 사람들은 여전히 기적보다 현실에 복종한 채 살고 있어. 참 안타까워. 예전의 네가 그랬듯 진정성과 간절함이 있으면 운명처럼 기적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말이지. 이젠 마음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는 기적을 꺼낼 차례야. 인생은 절실한 자에게 때론 마법을 부린다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진정성과 절실함은 결국 기적을 잉태한다고. 그리고 넌 결코 연애무능력자가 아니야. 오히려 사랑능력자라고 불려도 될 만큼 넌 잘 해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