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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굳은살처럼 박혀버린 그릇된 습관을
굳이 억지로 떼어낼라 치면
온전했던 삶마저 함께 뜯겨나갈까 봐
굳어 버린 그대로 방치한 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쁜 습관도
나를 나타내는 정체성이 되어 갔다.
나쁜 버릇은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그 단순하고도 적확한 삶의 이치를
직시하지 않았던 지난날.
절뚝거리는 주제에
세상이 깔아놓은 비포장 도로를
무모하리만큼 휘청이며 서성거렸다.
절뚝, 저얼뚝.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세상도 따라 흔들렸다.
내가 절뚝이니
세상도 덩달아 절뚝였다.
내가 자초한 후천적 절뚝이로서의 삶은
늘 초점이 맞지 않았다.
허리는 굽어 있고
숨소리는 불규칙적이었다.
들숨과 날숨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늘 호흡은 끊어질 듯 가빴다.
'넌 왜 변화를 두려워하는 거야?'
변화 대신 선택한 안주.
진일보를 버리고 퇴보를 거듭했던 나.
기괴한 내 걸음걸이를
남들이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그렇게 절뚝거리며
점점 기어갈 뿐이었다.
황소개구리를 잡아 시장에 팔겠다며 동네 저수지와 웅덩이 등지로 겁 없이 원정을 다녔던 미취학 아동 시절. 전라남도 순천시 덕암동에 기지를 마련한 개구리 사냥꾼 패거리들은 동네 곳곳을 활보하며 그날그날의 놀이를 궁리하곤 했다. 하루는 자기주장이 강한 코보(공기 마시듯 코를 자주 들이마셨던 친구) 녀석이 어린 마초들에게 어울릴 법한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를 제안했다.
"킁킁.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 어때? 훌쩍. 무서운 사람은 빠져."
"좋아. 우리 구슬 걸고 내기하자."
"이긴 사람한테 전부 몰아주기."
"코 좀 그만 마셔. 더러워."
코보의 제안은 자칫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파고들었지만, 싫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순간 마초에서 겁쟁이로 신분이 추락할 것이란 걸 모두들 직감했는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호응의 목소리에 동의의 의미를 담았다. 나도 선뜻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면서 대회 장소까지 제공하는 오지랖을 부렸다. 마침 우리 집 옥상에는 환기구 역할을 하는 2미터 높이 가량의 구조물이 하나 있었고, 구조물 아래에는 철제테두리를 두른 평상이 멀찍이 놓여 있었다. 평상시에도 구조물에서 평상으로 자주 뛰어내린다는 허풍을 지껄이며(사실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못했으면서...) 수학여행 인솔교사처럼 참가 선수들을 옥상으로 안내했다. 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 위에 허세라는 누름돌을 간신히 올려놓고 애써 태연한 척하며 심장 떨림을 담대함으로 위장했다.
이름하여 '구조물 난간에서 뛰어내려 평상 한가운데에 가장 가깝게 착지한 사람이 구슬 가져가기'라는 듣도 보도 못한 게임이 시작되었다. 양궁이나 컬링처럼 평상의 정중앙에 가장 근접하게 안착한 사람이 이기는 단순한 놀이. 우승자에게는 모두에게 조금씩 걷어 놓은 유리구슬을 독차지할 수 있는 특권이 걸린, 동심들에겐 블록버스터급 규모의 메이저 대회였다. 홈그라운드이기도 하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다 싶어 나는 호기롭게 1번 선수로 나섰다. 막상 구조물에 올라가 보니 높이도 높이지만 평상까지의 거리가 꽤 멀어 보였다. 평상을 조금 앞으로 당기거나 내기를 물리고 싶었지만 녀석들의 비웃음을 사기는 죽어도 싫었다. 결국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센 뒤 용감한 황소개구리처럼 폴짝 뛰어내렸다. 잠시나마 공중에 떠 있던 찰나의 순간, 지난 칠 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그 어린 나이에 죽음이란 관념을 떠올렸다. 평상 중앙까지 닿기엔 도약 거리가 턱없이 짧았다. 이대로라면 평상이 아닌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
결국 내 오른쪽 정강이는 평상의 철제테두리로 향했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나는 신음과 비명의 경계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그대로 옥상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어린 마초들은 내 괴성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내 어머니를 데리러 옥상 아래로 허둥지둥 달려가는 워크에식(work ethic)을 발휘했다. 아들 친구들에게 먹일 카스텔라를 만들고 계시던 어머니는 내가 다쳤단 소식에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옥상으로 뛰어와 일곱 살짜리 아들을 등에 짊어지고 동네 의원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친 아들을 등에 업고 달리는 어머니는 원더우먼 그 자체였다.
그날의 사고로 몇 주간 석고 깁스를 족쇄처럼 다리에 채워야 했다. 깁스의 무거움은 둘째 치더라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꼬랑내 고문은 당장 사상전환을 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들었다. 중량 및 후각과의 처절한 사투 이후, 드디어 깁스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깁스 이후 걸음걸이가 이상해졌는지 주변 사람들이 왜 자꾸 다리를 저냐며 어리둥절한 의문을 던졌다. 당시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리를 절었던 원인은 둘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한 번 부러졌던 다리였기에 조심조심 의식해서 걷다 보니 걸음을 걷는 본새가 부자연스러웠거나, 혹은 애초에 돌팔이 의사가 뼈를 잘못 붙였거나.
원인이야 뭐가 됐든 그때 이후 내 신발은 유독 오른쪽 다리의 발날 밑창 부분이 먼저 닳기 시작했다. 새 신발을 살 때마다 늘 오른쪽 다리 발날 부근 밑창 부분부터 닳았고 균형이 무너진 신발은 나를 후천적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군대 시절에는 사단장급 표창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서다가 사단장님이 저 자식은 군인이라는 놈이 걸음걸이가 왜 저러냐며, 현장에서 표창을 취소할 뻔한 일화도 있었다. 그렇게 나의 걸음걸이는 점차 절름발이로 고착화되어 갔다.
언제까지고 절름발이로 살 순 없었다. 신발을 새로 살 때마다 의식적으로 오른쪽 다리 엄지발가락에 힘을 빡 주고 안쪽으로 내딛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초반에 반짝.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전의 걸음걸이로 되돌아가 다시 오른쪽 다리 발날 쪽부터 신발 밑창이 닳기 시작했다. 어른이 된 지금, 예전보단 훨씬 나아진 걸음걸이로 지면을 딛고 있지만, 절름발이 습관이 완벽하게 고쳐지진 않은 듯하다. 밑창 닳는 속도만 조금 늦추어졌을 뿐 오른쪽 다리 발날 쪽 밑창이 닳는 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기존 신발이 낡아서 새 신발을 사는 게 아니라 신발 밑창 한쪽이 닳아서 새 신발을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학교에 행사가 있는 날이라 어울리지도 않는 정장을 갖춰 입고 그에 걸맞은 구두를 꺼내 신기 위해 신발장을 열었다. 오랜 시간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낡은 운동화가 못내 서운한 듯 말을 건네온다.
"어이, 절름발이 친구. 날 완전히 잊은 거야? 그날그날 패션에 맞춰 한 번쯤은 꺼내서 신어줄 수도 있었잖아. 서운하게 새 신발만 신기야?"
"그동안 지독한 발냄새를 참아가며 나의 발이 되어준 건 고마워. 미안한 얘기지만 넌 이제 신발 밑창이 기형적으로 닳아 있잖아. 널 신었다가 다시 절름발이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내 밑창을 닳게 한 게 누구였드라?"
"내 잘못이지. 그 점은 미안하게 됐수다."
"도대체 널 거쳐갔다가 폐기된 신발이 몇 켤레야?"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적은 숫잔 아니겠지."
"내 얘길 들어봐. 습관이란 건 쉽게 바꿀 수 없기에 잘못된 습관을 정상의 영역으로 돌려놓기 위해선 의식적인 노력이 꾸준히 동반되어야 해. 계속 절름발이로 살지, 남들처럼 평범한 걸음걸이로 되돌아 올진 확고한 의지와 실천에 달려 있지. 네 입장에선 노력을 해왔다고 자부하겠지만 잘 생각해 봐. 일곱 살 때부터 대략 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발날 쪽 신발 밑창이 닳는다는 이유로 새 신발을 사고 있잖아. 서운하게 들릴지 몰라도 결국 정상화 및 개선을 위한 네 노력은 극히 미미했다는 거야. 자신을 절뚝이게 하는 요인을 자각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함으로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선해 보겠다는 결단과 그에 걸맞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해. 물론 최선의 노력이 언제나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을 만들 수는 있거든. 진짜 절뚝이는 건 네 다리가 아니라 너의 나약한 의지임을 명심해. 그동안 절름발이로 살아와서 괴로웠지? 괜찮아. 이제부터 차근차근 고쳐 나가자. 넌 분명 필사적인 노력을 쏟을 테고 걸음걸이는 정상화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