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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Dec 12. 2024

아이씨, 뭐라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내게 건네는 몇 마디

 국가 차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대한 금음령(禁飮令)을 내리지 않은 이상, 사시사철 아이스 아메리카노(이후 아아)를 즐겨 마시는 편이다. 이유인즉슨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차디찬 아아를  모금 쭈욱 들이키비정한 세상이 묻힌 온갖 스트레스 얼룩들이 개운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스며들기 때문이다. 집하곤 꽤 멀지만 자주 가는 커피 체인점이 있다.(포인트도 넉넉하게 쌓일 만큼 단골 커피집이다) 예전엔 중년의 사장님이 직접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았는, 매장 안에 키오스크가 들어선 후 사장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직원분도 대폭 물갈이되었다. 세상은 날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체감한다.


 고즈넉한 공기가 감도는 한가한 토요일 아침, 큰애를 바이올린 교실에 욱여넣고 오랜만에 단골 커피집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 보는 듯한 직원 외에는 매장 안에 인기척은 없었다. 오늘은 아아를 일찍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유쾌한 예감이 마음 주변을 짜릿하게 감돈다. 럭키 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아를 주문하니 키오스크가 메롱, 하며 영수증을 내밀었다. 주문 번호와 주문 내역이 찍힌 영수증을 뽑아 외투 오른쪽 주머니에 습관적으로 찔러 넣었다. 대략 1-2분 뒤면 나는 아아를 쪽쪽 빨며 거드름을 부리면서 퇴장하게 될 것이다.


 때마침 백화점 오픈런을 방불케 만큼 손님들이 좀비 떼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키오스크 사용법을 모르는 중년 여성이 카운터에 직원을 세워 놓고 주문 버퍼링을 타는 사이, 다른 일행인 듯한 젊은 여성들은 가벼운 터치와 익숙한 스크롤질 몇 번으로 주문을 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엔가 박혀 있는 스피커에선  '배달의 민족, 주문'이라는 명랑하고도 기계적인 안내음이 직원에게 엄포를 놓았다. 급작스레 주문이 쏟아지니 직원분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쓰러워 보였지만 바쁘니까 청춘인 것이다. 조금만 방문이 늦었어도 한참을 기다릴 뻔했다. 휴, 나이스 데이.


 성과급이 아닌 시급제로 일하는 직원분의 얼굴엔 패닉이란 단어가 새겨진 것 같았다. 좀체 일에 속도가 붙질 않는다. 손놀림은 바쁜데 무언가 완성되어 가는 느낌은 없달까. 어차피 내가 첫 번째 손님이고 아아쯤이야 커피 나와라 뚝딱, 하면 만들어지는 초간단 레시피이기 때문에 미리 음료가 나오는 곳 근처에 죽치고 서 있기로 했. 그때부터 매장 안의 기류가 오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직원분은 딸기를 갈고, 초코 시럽을 뿌리고, 샌드위치 기성품을 레인지에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아를 만드는 본새가 아닌데? What happened?


 난데없는 의외성이 개입했지, 내가 오기 전에 미리 주문된 것이 있었나 보구나, 하는 마음이 흔들리는 평정심 간신히 붙잡았다. 잠시 후 상투적인 헬멧을 머리에 얹은 젊은 남성이 매장문을 박차면서 터프하게 들어섰다.


"배달의 민족이요."


 내가 오기 전에 미리 주문된 음료였을까? 힘겹게 배달 주문 음료를 낸 직원은 시작이 반인 듯한 한숨을 돌린 후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고 템핑을 하며 에스프레소 샷을 추출했다. 휴, 이제 내 아아가 나오겠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직원은 미리 준비한 컵에 에스프레소 샷과 우유를 섞더니 선명한 농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희멀건 색감의 라테를 만들어 냈다.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이요."


 키오스크를 사용할 줄 몰라 카운터에서 직접 주문을 건 중년 여성이 날 한 번 쓱 쳐다보더니 라테를 들고 황급히 도망간다. 분명 나보다 늦게 왔는데...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예감이 닭살처럼 온몸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직원이 준비한 음료는 피넛라테. 아까 키오스크로 주문을 한 젊은 여성들의 음료다. 젊은 여성들은 길을 걷다가 지폐라도 주운 듯한 표정으로 내 반응을 잠시 훑더니 이내 음료를 들고 부리나케 매장을 빠져나간다.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얼굴은 상기되기 시작했다. 낯선 여성한테 말을 잘 못 건네는 소심한 성격이지만, 유치원생이 대충 묶은 운동화 끈처럼 이성의 끈은 이미 풀려 버렸다. 외투에 처박아둔 영수증을 신경질적으로 꺼낸 후 직원에게 젠틀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저기요. 제 주문 번호 3번인데요. 아직 멀었나요?"

"아, 맞다..."


 아. 맞다? 당신은 지금 주문 순서를 틀렸는데 맞긴 뭐가 맞아? 순간 '아이씨, 뭐라카노?' 라 따지고 싶었다. 직원은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꽤 효과적인 몸놀림으로 1분 만에 뚝딱 아아를 생산해 냈다. 이렇게 뚝딱 만들어질 걸 난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십 분동안 아무 이유 없이 서 있었어야만 했을까. 그래도 내 마음 한 구석엔 어느새 관용의 싹이 움터 올라 어리숙한 직원분의 사소한 실수이니 이해해 드리라고 위로의 줄기를 뻗치고 있었. 그래, 마음이 잘생긴 내가 참자. 사과 한 마디면 모든 걸 용서해 주겠어. 잠시 후 직원은 메마른 표정과 다소 딱딱한 동작으로 내게 아아를 건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한 게 아니라 감사하다고?, 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면서 내 이성을 얼키설키 뒤집어 놓았다. 자꾸 내 안의 음침한 자아는 그냥 커피잔을 바닥에 엎어버리라며 사악한 목소리로 꼬드겼다. 하지만, 예전의 철없던 시절과 작별을 고한 나로선, 그동안 써온 글들이 진정 나의 변화된 사상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꼬장을 부리는 대신 그대로 커피를 들고 조용히 나가야만 한다. 바쁜 청춘은 나처럼 젠틀한 어른이 보듬어 줘야 한다. 별다른 코멘트와 반응 없이 묵묵히 매장을 나갔다. 뭐, 아내에겐 동네 양아치형한테 삥 뜯긴 어린아이처럼 낱날이 일러바쳤지만.


내 속내가 상했다는 것을 읽기라도 한 듯 내 손에 들리운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쓰디쓴 어조로 내게 말을 건네 온다.


"내 얘길 들어 봐. 일단 난동 피우지 않고 어른스럽게 잘 대처한 건 인정. 넌 단지 사과 한 마디를 바랐지만 대로 되지 않아 속상했지? 너도 수많은 실수를 겪어 왔듯이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게 마련이야. 사실 사과라는 것이 사랑 고백만큼 참 어려운 거야. 사과에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지. 막상 용기 내어 사과를 해도 어떤 단어와 뉘앙스를 활용하냐에 따라 상대방에겐 자칫 변명이나 핑계로 비칠 수도 있어. 사과라는 건 네 감정이 아닌 상대방의 감정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거든. 진정한 사과는 상대방의 딱딱해진 감정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힘이 있어. 이번 경험을 통해서 사과의 본질에 다가갔으면 좋겠어. 너도 언젠간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잖아? 사과란 나로 인해 상처받은 누군가에게 내 그릇된 언행에 대해서 잘못을 비는 거야. 사과는 의문형이 아니기 때문에 괜한 자존심 내세우며 어쩔 수 없이 사과를 다는 뉘앙스를 풍기면 절대 안 돼. 사과의 본질은 상대에 대한 헤아림이거든. 어찌 보면 사과는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아닌, 따스한 아메리카노를 건네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얼어붙은 상대의 마음을 따스히 녹여 줘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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