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세상은 늘 시끌벅적하다.
주변에서 새어 나오는 온갖 소음으로
나만의 안온한 고요가 흔들린다.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인과 어우러지는 삶을 중요시했지만
난 남들과 어울리는 대신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차디찬 바닥에 초라하게 옹송거렸다.
내가 그토록 손에 넣고 싶은 것들을
너무 쉽게 손에 쥐고 있는 것만 같은
그들의 삶은 왠지 반칙 같았다.
애초에 출발선부터가 잘못 그려진 것 같은
불공정한 레이스에서
나는 한탄의 호흡을 내뱉으며
한없이 뒤처진다고 자조했다.
'삶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야.'
인생이라는 경주는
단거리 결승선을 빨리 통과하는 게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장거리 레이스를
지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었음을
달리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다 보니 시나브로 알게 되었다.
저마다의 결승 테이프는 동일한 지점이 아닌
각자 다른 지점에 준비되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저마다의 속도와 체력, 결승선이 각기 다름에도
오로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러너들의 삶이
나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왔던 나는
또 얼마의 넘어짐과 부딪힘을 견뎌야
내 삶을 완주할 수 있을까.
볼펜도 똥을 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유성 볼펜 끝자락엔 작고 동그란 쇠볼이 붙어 있어 볼이 굴러간 자리엔 잉크의 족적이 남는다. 이때 볼에 붙어 있던 유성 잉크 덩어리가 보기 흉한 본새로 새어져 나오는 것을 볼펜똥이라 부른다. 볼펜에 자를 대고 밑줄을 긋거나, 볼펜을 가파른 각도로 사용하면 심심치 않게 볼펜똥을 만나볼 수 있다. 볼펜똥이 주는 너저분함이 싫은 사람은 수성 볼펜을 쓰면 되지만, 난 개인적으로 똥을 싸지르는 유성 볼펜이 더 인간적(?)이라 생각해 단출한 정감이 간다.
임용 고사 준비에 정력과 정심을 쏟았던 사범대학교 4학년 시절. 정성스러운 밑줄 긋기와 빽빽한 귀퉁이 메모가 임용 고사 합격의 스모킹 건(smoking gun)이라고 여긴 탓에 두꺼운 전공 서적에 일일이 밑줄을 긋고 깨알 메모를 해가며 합격의 의지를 불태웠다. 다행히 책이 타는 불상사는 없었으나, 볼펜똥은 책 군데군데에 잔망스러운 얼룩을 남겼다. 볼펜똥이 나올 때마다 볼펜촉을 일일이 화장지로 닦아내는 일은 붓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가는 것만큼이나 귀찮은 작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를 오래 해서 인지 구조가 잠시 뒤틀렸는지 불현듯 볼펜똥으로 분출되는 잉크가 아깝다는 기괴한 상념이 찾아왔다. 볼펜똥의 재료도 엄연한 잉크인지라 마치 자동차 기름이 졸졸 새는 것 같은 낭비적 느낌이랄까. 그리 하여 임용고사 준비를 하면서 점점 현실 감각이 사라져 가던 나는, 볼펜똥을 효과적으로 재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현대 추상 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도 울고 갈 볼펜똥 아트였다. 수험생의 폐쇄적인 삶과 극심한 스트레스를 상징하는 볼펜똥을 두루마리 휴지라는 일상적인 캔버스에 담아 차곡차곡 점의 형태로 만들어나가는 고도의 세련된 액션 페인팅...
일단 두루마지 휴지 두 칸을 떼어서 절취선을 따라 반으로 고이 접는다. 그다음 휴지 위에 연필로 그림의 도안을 스케치한다. 그러고 나서 도안의 공백을 볼펜똥으로 한 점 한 점 채워나가다 보면 꽤 그럴싸한 볼펜똥 아트가 탄생한다. 볼펜똥으로 만들어낸 첫 작품은 함초롱바탕체에 가까운 '합격'이라는 글자였다. 이후 장미, 별 등 합격의 기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고 희망의 의미를 내포하는 사물들을 모조리 그려 나갔다. 그렇게 태어난 작품들은 스카치테이프를 이용하여 정독실 책상 벽면에 차곡차곡 붙여 놓았다. 어느새 책상 벽면은 볼펜똥 아트 갤러리가 되었고 투명한 물속에서 번져가는 한 방울의 잉크처럼 내 마음 안에선 시시껄렁한 만족감이 퍼져나갔다.
볼펜똥 아트 생산에 열중하고 있던 사이, 불현듯 내 삶의 고갱이가 전공 서적 속 내용의 온전한 이해가 아닌, 볼펜똥의 기계적인 생산에만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서늘음습한 불길함도 찾아왔다. 또한 갈수록 완성도가 더해지는 볼펜똥 그림들은 일종의 스탕달 증후군마저 낳았다. 그림이 주는 황홀경에 빠져 전공 서적을 보면서도 틈틈이 그림에 시선을 뺏겼으니 말이다.
이러다 임용 고사를 보기도 전에 정신 병원으로 끌려갈 것 같아 결국 볼펜똥 그림을 모두 폐기처분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다시 활자가 그리는 세계로 방향을 틀었다. 정신을 너무 늦게 차렸던 걸까. 그해 임용 시험에서 아주 미세한 차이로 쓰디쓴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단단한 수박을 쪼개 시원 달콤한 과육을 맛봤어야 했지만, 나는 그동안 수박 껍질만 날름날름 핥은 격이었다. 나날이 늘어나는 볼펜똥 그림은 압도적인 공부량의 과시가 아닌, 내 엉뚱함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보다 잘 갖추고, 잘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여럿, 아니 꽤 많다. 그들은 비싼 옷, 비싼 차. 비싼 집 등으로 현생의 삶을 멋들어지게 치장한다. 물론 그들의 삶의 양식에 어깃장을 놓겠다는 게 아니다. 단지 학교에서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패딩을 걸치고 다니는 학생을 목격할 때면 가끔 처연한 마음이 반갑지 않게 찾아오곤 한다.
'저 패딩 살 돈이면 서재에 가볍고 성능 좋은 노트북 한 대쯤 들여놓을 수 있을 텐데.'
'저 패딩 살 돈이면 책장 1단에서 5단까지 빳빳한 새책으로 채울 수 있을 텐데.'
'저 패딩 살 돈이면 도대체 한우 특수 부위가 몇 인분이야?'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 때면 열등감에 잠식되기 전에 재빨리 성경의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을 소환하곤 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 구절을 마른 장작 삼아 불씨가 꺼져 가는 머릿속 스토브에 쑤셔 넣는다. 읽고 있던 책을 꺼내 들어 책날개로 가름한 페이지를 소중히 펼친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니깐 책이라도 탐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독서에 탐닉한다. 활자 하나하나, 의미 하나하나가 나의 자산이라는 심정으로. 어느새 스토브의 불길이 거세진다.
내 손에 쥐어진 낡은 모나미 153 볼펜이 물질적 열등감과 정신적 승리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를 향해 잉크향 입냄새를 풍기며 말을 건네온다.
"오, 한때 잭슨 폴록을 꿈꿨던 수험생, 잘 지냈어?"
"말은 똑바로 합시다. 잭슨 폴록이 아닌 존 키팅(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에서 학생들의 정신을 일깨운 영어 교사, '카르페 디엠'이라는 명대사로 유명하다)을 꿈꿨던 청춘이었지."
"난 또 네가 볼펜똥 그림을 야무지게 잘 그려서 예술가의 길로 진로를 튼 줄 알았지."
"그냥 다재다능하다는 걸로 결론 냅시다. 그림도 잘 그리고, 수업도 잘하는 만능 엔터테..."
"됐고, 그런데 왜 여전히 열등감에 젖어 있는 것 같지?"
"세상에 열등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열등감은 다들 가지고 있을걸?"
"열등감 자체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들리네. 그래서 남들이 가지고 있지만 넌 못 가진 것들에 대한 열패감이 든다는 말이지?"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비교하는 마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내 얘길 들어봐. 난 네가 피상적인 것에 얽매여 본질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 남한테 잘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너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야 돼. 물질과 권위에 대한 노예근성은 과감히 버려. 물질을 좇는 게 아니라 물질이 널 따라오는 삶을 살아야 돼. 외제차? 비싼 옷? 그런 걸 타거나 걸치면 남들 눈에 띄기야 하겠지. 어렴풋한 선망의 눈빛도 받으면서 상대적 우월감이나 은밀한 만족감도 느낄 수 있을 테고 말이야. 문제는 그러한 감정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귀신같이 사그라들고 만다는 점이지. 네 삶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이야.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인생이 아니라, 너라는 정체성을 점차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방향성이지. 달걀도 겉만 보고서는 그게 삶은 달걀인지 날달걀인지 알 수 없듯이 우린 겉이 아닌 안을 들여다봐야 해. 타인과의 sns 소통에만 열을 올려 온갖 잘난 척, 있어 보이는 척하는 사진들만 업로드하지 말고 너만의 은밀한 플랫폼을 개설해서 그곳에 너의 꿈의 흔적, 흔들리지 않는 비전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거야. 보이는 외형이 아닌 너의 내면을 아름답게 수놓길 바라. 온갖 희망적인 감정들이 너를 팔로워 하면 넌 네 인생이란 시간과 공간에서 유명한 인플루언서(많은 팔로워를 보유하여 영향력이 있는 사람)가 되는 거지. 볼펜똥이 아닌 볼펜이 써 나가는 인생 노트에 집중하길. 중요한 내용에 밑줄을 긋고 귀퉁이 메모하는 건 너의 특기잖아. 넌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어. 아참, 공부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 중 하나가 뭔지 알지? 오답 노트를 잘 활용하는 사람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아. 꼭 명심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