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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처럼 쏟아진 몽상의 한 줄기.
우리의 마음이 형체를 갖추어
마치 등굣길에 걸어매는 책가방처럼
각자의 마음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기묘한 삶의 단편.
각자 마음의 모양과 크기와 색깔을
알아볼 수 있는 삶이란 어떠할까.
진보랏빛으로 가득한 마음에겐 용기를 심어주고
울퉁불퉁하고 불규칙한 마음에겐 위로를 건네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
늘 꽁꽁 숨어 있는 마음은
가끔 표정과 행동으로 은근한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확한 깊이와 본질은
여전히 미스터리라는 두꺼운 휘장 안에 감춰져 있다.
'보이지 않을지언정 사라진 것은 아니야.'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고난도의 직소퍼즐을 맞추는 일과 같다.
산만하게 흐트러진 마음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맞춰보다가
헤아리길 포기한 적이 수없이 많았다.
왜 나는
1500 피스짜리 직소 퍼즐을 마음에 들여놓고서
여기저기 조각을 헤집으며 허우적댔던 걸까.
잘 맞추지도 못할 거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대한 금음령(禁飮令)을 내리지 않은 이상, 사시사철 아이스 아메리카노(이후 아아)를 즐겨 마시는 편이다. 이유인즉슨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차디찬 아아를 긴 모금 쭈욱 들이키면 비정한 세상이 묻힌 온갖 스트레스가 개운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에 젖어들기 때문이다. 집하곤 거리가 있지만 자주 가는 커피 체인점이 있다.(포인트도 넉넉하게 쌓일 만큼 단골 커피집이다) 예전엔 미모의 사장님이 직접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았는데, 매장 안에 키오스크가 들어선 후 미모의 사장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늘 친절하게 응대해 주던 직원분들도 대폭 물갈이되었다.
고즈넉한 공기가 감도는 토요일 아침, 큰애를 바이올린 교실에 밀어 넣고 오랜만에 단골 커피집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 보는 듯한 직원 한 분 외에는 매장 안에 별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오늘은 아아를 일찍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유쾌한 예감이 마음 주변을 짜릿하게 감돈다. 럭키 가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아를 주문하니 키오스크가 메롱, 하며 놀리듯 영수증을 빼꼼 내밀었다. 주문 번호와 주문 내역이 찍힌 영수증을 뽑아 외투 오른쪽 주머니에 습관적으로 찔러 넣었다. 대략 1-2분 뒤면 나는 아아를 쪽쪽 빨며 거드름을 부리면서 퇴장하게 될 것이다.
때마침 백화점 오픈런을 방불케 할 만큼 손님들이 좀비 떼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키오스크 사용법을 모르는 중년 여성이 카운터에 직원을 세워 놓고 주문 버퍼링을 타는 사이, 다른 일행인 듯한 젊은 여성들은 가벼운 터치와 익숙한 스크롤질 몇 번으로 능숙하게 주문을 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엔가 박혀 있는 매장 스피커에선 '배달의 민족, 주문'이라는 명랑한 기계음이 직원에게 시시포스 콤플렉스를 강요했다. 급작스레 주문이 쏟아지니 직원분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쓰러워 보였지만 젊은 시절의 내 모습처럼 바쁘니까(?) 청춘인 것이다. 조금만 방문이 늦었어도 한참을 기다릴 뻔했다. 휴, 나이스 데이.
성과급이 아닌 시급제로 일하는 직원분의 얼굴엔 마치 패닉이란 단어가 새겨진 것 같았다. 좀체 일에 속도가 붙지 않아 보였다. 손놀림은 바쁜데 무언가 완성되어 가는 느낌이 없는 햄스터의 쳇바퀴 같달까. 어차피 내가 첫 번째 손님이고 아아쯤이야 커피 나와라 뚝딱, 하면 만들어지는 초간단 레시피이기 때문에 미리 음료가 나오는 곳 근처에 죽치고 서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중 나왔다. 그때부터 매장 안의 기류가 오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직원분은 딸기를 갈고, 초코 시럽을 뿌리고, 샌드위치 기성품을 레인지에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아를 만드는 본새가 아닌데? What happened?
난데없는 의외성이 개입했지만, 내가 오기 전에 미리 주문된 것이 있었나 보구나, 하고 흔들리는 평정심을 간신히 붙들었다. 잠시 후 상투적인 헬멧을 머리에 얹은 젊은 남성이 매장문을 박차면서 터프하게 들어섰다.
"배달의 민족이요."
내가 오기 전에 미리 주문된 음료였을까? 힘겹게 배달 주문 음료를 낸 직원은 시작이 반인 듯한 한숨을 돌린 후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고 템핑을 하며 에스프레소 샷을 추출했다. 휴, 이제 내 아아가 나오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직원은 미리 준비한 컵에 에스프레소 샷과 우유를 섞더니 선명한 농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희멀건 색감의 라테를 만들어 냈다.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 나왔어요."
키오스크를 사용할 줄 몰라 카운터에서 직접 주문을 건 중년 여성이 무안한 표정으로 날 한 번 쓱 쳐다보더니 라테를 들고 황급히 매장밖으로 도망갔다. 분명 나보다 늦게 왔는데...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예감이 닭살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직원이 준비한 음료는 토피넛라테. 아까 키오스크로 주문을 한 젊은 여성들의 음료다. 젊은 여성들은 길을 걷다가 지폐라도 주운 듯한 표정으로 내 반응을 잠시 훑더니 이내 음료를 들고 부리나케 매장을 빠져나갔다. 슬슬 내 얼굴은 핏빛으로 상기되기 시작했다. 낯선 여성한테 말을 잘 못 건네는 소심한 성격이지만, 유치원생이 대충 묶은 운동화의 끈처럼 내 이성의 끈은 풀려 버렸다. 외투에 처박아둔 영수증을 신경질적으로 꺼낸 후 가볍게 이의를 제기했다.
"저기요. 제 주문 번호 3번인데요. 아직 멀었나요?"
"아, 맞다..."
아. 맞다? 당신은 지금 주문 순서를 틀렸는데 맞긴 뭐가 맞아? 순간 '아이씨, 뭐라카노?' 라며 따지고 싶었다. 직원은 내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꽤 효과적인 몸놀림으로 1분 만에 뚝딱 아아를 생산해 냈다. 이렇게 뚝딱 만들어질 걸 난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십여 분 동안이나 죄인처럼 서 있었어야 했을까. 그래도 내 마음 한 구석엔 어느새 관용의 싹이 움터 올라 어리숙한 직원분의 사소한 실수이니 이해해 드리라고 위로의 줄기를 뻗치고 있었다. 그래, 얼굴은 평균 이하지만 마음만은 잘생긴 내가 참자. 사과 한 마디면 모든 걸 용서해 주겠어. 잠시 후 직원은 메마른 표정과 다소 딱딱한 동작으로 내게 아아를 건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한 게 아니라 감사하다고? 삐, 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면서 내 이성을 얼키설키 뒤집어 놓았다. 자꾸 내 안의 음침한 자아는 그냥 커피잔을 바닥에 엎어버리라며 사악한 목소리로 꼬드겼다. 하지만, 예전의 철없던 시절과 작별을 고한 나로선, 그동안 써온 글들이 진정 나의 변화된 사상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꼬장을 부리는 대신 그대로 커피를 들고 조용히 나가야만 한다. 바쁜 청춘은 나처럼 젠틀한 어른이 괜찮다며 보듬어 줘야 한다. 결국 별다른 컴플레인을 남기지 않고 묵묵히 매장을 나갔다. 그리고 아내에겐 동네 양아치형한테 삥 뜯긴 어린아이처럼 아르바이트생의 만행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내 속내가 상했다는 것을 읽기라도 한 듯 내 손에 들린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쓰디쓴 어조로 내게 말을 건네 온다.
"왠지 마음에 불이 난 것 같은데? 나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불길 좀 누그러뜨려."
"내가 철부지인 줄 알아? 괜찮아. 나도 예전에 여러 가지 알바를 해봐서 이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어. 입대하기 전에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도 꽤나 실수했었지."
"푸하하하. 언심불일치인 것 다 알아. 실은 화가 많이 났잖아."
"... 티 나?"
"이미 네 표정에 다 쓰여 있는 걸? 감정은 숨기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감춰지는 게 아니야."
"사실 화가 나는 건 사실이야. 사과 한 마디면 부드럽게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잖아."
"내 얘길 들어 봐. 일단 난동 피우지 않고 어른스럽게 잘 대처한 건 인정해. 넌 단지 사과 한 마디를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했지? 너도 수많은 실수를 겪어 왔듯이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게 마련이야. 사실 사과라는 것이 사랑 고백만큼 참 어려운 거야. 사과에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지. 막상 용기 내어 사과를 해도 어떤 단어와 뉘앙스를 활용하냐에 따라 상대방에겐 자칫 변명이나 핑계로 비칠 수도 있어. 사과라는 건 네 감정이 아닌 상대방의 감정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거든. 진정한 사과는 상대방의 딱딱해진 감정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힘이 있어. 이번 경험을 통해서 사과의 본질에 다가갔으면 좋겠어. 너도 언젠간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잖아? 사과의 본질은 네가 어쩔 수 없이 건네는 감정의 한 형태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헤아림이 전제되어야 해. 얼어붙은 상대의 마음을 따스히 녹여 줘야 하는 게 사과의 본질이라면, 사과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보단 따스한 아메리카노를 건네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이번 일이 속상했겠지만 네가 보여 준 묵직한 관용은 결코 헛된 게 아니야. 좋은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는 점, 칭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