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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은 간편하고 명료하다.
모 아니면 도
미남 아니면 추남.
우군 아니면 적군
찬성 아니면 반대
성공 아니면 실패
진보 아니면 보수
학교에서도 이분법은 큰 힘을 발휘한다.
우등생이거나 열등생이거나
말 잘 듣는 아이거나 말 안 듣는 놈이거나
야자를 하거나 안 하거나
성적이 올랐거나 내렸거나
인생은 이분법이라는 지독한 막대기로
내 인생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온전한 1인분으로 살아가기도 벅찬 인생을
난 0.5인분으로 각각 쪼개진 채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반쪽짜리 삶을 살았다.
'이등분이 아닌, N등분도 있다는 사실을 여태껏 몰랐어?'
생각과 사상이 절반으로 쪼개져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미련한 삶.
아는 게 없을수록
아집의 몸집을 커지기 마련이라
고집과 독선의 눈망울로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니
무엇 하나 제대로 보였을 리가 있나.
밝은 세상도 나에겐 깜깜이였을 뿐.
난 여태껏
두 눈 달린 외눈박이로
세상의 절반을 진짜라 착각하며 살았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흥미로운 논제로 아들들은 열띤 토론을 진행 중이었다. 뜻하지 않는 공짜 자존감을 얻을 기회라 아이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며 내심 아빠가 이기길 바랐다. 요즘 들어 아빠에 대한 충성심이 부쩍 오른 둘째가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난 아빠가 좋아."
"왜?"
"아빠는 게임도 시켜주고 힘도 세. 형아는 누가 좋아?"
"난 엄마, 아빠 다 좋아."
결과적으로 1승 1무의 전적이니 근소하게나마 아내를 꺾은 셈이다. 아들들이 판단하는 도량의 깊이와 힘의 논리상으론 엄마보단 아빠가 우위를 점했다. 둘째에겐 충성심에 대한 보상으로 천 원짜리 포켓몬 카드라도 사줘야겠다.
작년 연말부터 국가가 뒤숭숭하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 논쟁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관련된 인터넷 기사 댓글을 보면 몇몇 국민들은 여전히 동서갈등, 좌우갈등이라는 낡아빠진 프레임 속에 갇혀 얼굴 없는 상대방을 향해 선 넘는 비방을 쏘아댔다. 이분법과 흑백논리는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가장 확실하고 단순한 무기로서 인류 역사를 관통하며 특정 가치와 사상을 극단적으로 정당화시켜 왔다. 극단의 논리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지만, 나 역시 알게 모르게 흑백논리의 진영에 발을 담그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빠가 좋다는 둘째의 말 한마디에 환호하는 모습에서 나만의 편협한 이분법적 논리와 사상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난 돈만 벌어올 뿐이지 실제로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케어하며 사랑을 듬뿍 퍼주는 건 엄마다. 여보 사랑해. 앞으로도 아이들을 잘 부탁해. 아무래도 난 육아 체질이 아닌가 봐...
단언컨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남에게 원망의 말을 한마디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조차 유대인들의 원색적인 비난을 감내하며 끝내는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나 역시 나름 이타적이고 순박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왔지만, 날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언제 어디서나 끊이지 않았다. 내 감정의 대지엔 회의감 섞인 구름이 불쾌하게 피어올라 적대감을 품은 비구름으로 탈바꿈해 마음 곳곳에 세찬 소나기를 퍼부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나의 진면목을 몰라주는 거야? 내가 숨만 쉬어도 그것조차 꼬투리 삼아 날 부정하는 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 거야? 나의 일부를 전체인양 착각하여 매도하는 당신은 대체...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설문 작성하기 수행평가를 실시했다. 인공지능이 써 준 건지, 본인의 순수한 지성에서 뽑아낸 것인지 칼 같이 가름할 도리는 없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고 상대 논리의 허점을 공격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게 펜을 굴렸다. 간혹 소수의 아이들은 양측 논리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최종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이런 아이들의 글을 보면 생각의 깊이가 보통은 아니라는 걸 느낀다. 그동안 사설문의 주된 평가 기준이 글쓴이의 주장은 합당한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적절하고 타당한가, 정도였다면 이제는 한 가지 평가 요소를 더 추가해야 한다. 바로 상대편의 주장과 근거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는가, 를 말이다.
아침 출근 전에 신발장에 붙어 있는 전신 거울에 날 비추며 혹시 입가에 김가루나 고춧가루가 묻어 있지는 않은지 점검했다.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떼어내려고 손가락을 뻗어 보지만 거울의 반대적 특성을 그새 망각하고 손가락은 반대쪽을 향했다. 거울이 한심한 낯빛을 띤 채 쨍쨍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온다.
"바보 아냐? 김가루 하나 제대로 못 떼어 내서 허둥지둥 대는 꼴을 보아하니."
"잠시 네가 거울이라는 걸 망각했을 뿐이야. 나 이래 봬도 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 나온 엘리트라고."
"수능에서 수학이랑 물리를 망한 걸로 아는데..."
"물리하고 수학만 아니었더라면 서울대학교 갔을 걸? 그랬다면 아마 현대사의 지각 변동을 일으켰을 수도..."
"헛소리 집어치우고 내 얘길 잘 들어봐. 우리는 찬성을 위한 찬성이 아니라 찬성을 위한 반대를 해야 해. 힘의 역학 관계, 이익 창출 여부, 개인의 편향적 논리로 본인의 생각이나 사상을 합리화하면 안 돼. 자기가 속한 진영을 위한 무조건적인 동조보단 생각이나 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폭넓은 고찰이 필요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반대를 위한 찬성을 해야 함도 같은 이치겠지. 설득력 있는 주장과 근거를 펼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관점에 갇혀 대상을 바라보기보단 상대방의 주장과 근거 역시 꿰차고 있어야 해. 목소리만 커서 고집스럽게 자기의 주장만을 강조하는 사람을 봐봐. 진상 중에 진상이지? 그보다 상대방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는 사람, 상대방의 주장도 수긍하며 자신의 주장을 천천히 펼쳐나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지. 주장에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면 반대의 관점까지 고려하는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해.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고 악감정을 근거로 그 사람을 원망하기보다 나 자신을 돌아보며 그 사람의 입장이 돼봐야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내 이면을 발견할 수 있어. 정작 내 등에 난 뾰루지가 나한테 안 보이는 것처럼 말이지. 자신의 밝은 면만 억척스럽게 내세우지 말고 내 어두운 면도 직시할 줄 하는 용기가 필요해. 반대도 수용하고 인정해 나갈 때 진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는 비밀의 문이 열리는 거지. 너의 진짜 모습은 어떻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