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부분은 가깝고 전체는 멀다.
가까운 데선 부분이 보일지 몰라도
전체의 모습은 파악하기 어렵다.
널따란 이성보단 조급한 감정이 앞서서
난 무언가를 향해 바싹 다가서는 데만 급급했다.
눈이 나빠 근시형 안경을 쓴 탓에
언제나 근경은 선명했고
원경은 흐릿했다.
대학 시절.
유독 쾌활하고 장난기 가득한 동기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적극적인 능청스러움은
우릴 가까운 친구 사이로 맺어줬다.
하지만 오해와 오해가 퇴적되어
그 친구와 나 사이엔
소원한 황야가 만들어졌다.
다시 그 친구의 손을 맞잡고 싶었으나
녀석은 이 지랄 맞은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본인의 의지로 몸에서 영혼을 해방시켰다.
난 여지껏 그 친구의 부분만을 보았다.
밝음 뒤에 감춰진 그 친구의 어두운 가정 상황과
비참할 수도 있는 결혼 생활을
난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난 그가 늘 밝음 속에 존재하는 줄만 알았다.
그의 쓴웃음을 그의 행복과 직결시켰다.
녀석은 늘 행복한 줄만 알았다.
'넌 왜 지극히 작은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거야?'
진작에 그 녀석의 상처를 알아채어
어떤 위로도 건네지 못하고
공감의 눈물도 흘려주지 못한
못난 나 자신이 끔찍스러웠다.
그래서 녀석의 미소가 걸린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한없이 울먹였다.
날 용서해 달라고
너의 삶 너머를 보지 못해서
너의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해서
너의 전부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이제는 상실감 속에 늙음을 받아들여야 할 나이가 온 듯하다. 최근 들어 스마트폰이나 책을 볼 때 글씨가 어지럽게 춤을 추거나 초점이 흔들린다. 눈에서 일정 거리만큼 텍스트를 떨어뜨려 놓아야 그제야 글자는 선명하게 다가오며 의미를 펼친다. 이게 말로만 듣던, 나한테만은 절대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노안(老眼)이라는 건가? 건강에 무감각한 성격이라 안과에 가는 것이 귀찮아 인터넷을 뒤적거려 눈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내가 스스로 내린 나의 진단은 일반적인 정시형 노안에 가까웠다. 점차 탄력성이 떨어져 가는 내 수정체를 생각하니 망막에는 투명한 서글픔이 맺혔다. 책 읽을 때 쓰는 노안용 안경이 따로 있다고 하던데 나도 이제는 그것을 구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이후 책을 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러 근시형 안경을 구입하고야 만다.) 가뜩이나 노안(老顔) 소리 듣고 사는 것도 서러운데 노안(老眼)까지 더해질 줄이야... 쌍노안이라니... 흑.
반갑지 않게 찾아온 노안과 힘겨루기를 하며 최근에 클레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다. 흡입력 있는 서사를 잔잔히 따라가던 중 한 문장이 내 시선을 억지로 멈춰 세웠다. 그 문장은 서사적 반전에서 오는 사소한 충격을 넘어 내 머릿속에서 진눈깨비처럼 흩날렸다. 도저히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전 서점에서 충동구매한 노크식 형광펜으로 정성껏 하이라이트를 그었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가까울수록 보기 어렵다는 말에서 나는 사유의 심지를 당겼다. 나와 가까운 가족, 친지, 친구들을 나는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초점이 흔들려 잘 안 보이는 것이 아닐까. 멀수록 안 보이는 것은 객관적인 물리 현상이라지만, 가깝기 때문에 잘 안 보인다는 역설적인 인문학적 명제는 삶의 숨겨진 이치를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닐까. 대상의 피상을 보고 본질까지 안다며 자부했던 나의 지난 인생은, 어찌 보면 필름 낭비에 가깝지 않았을까.
재작년 연말쯤인가.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들(당시 난 고3부장이었다.)과 수능도 끝났거니 홀가분한 마음을 싸매고 자연의 품속으로 힐링 연수를 다녀왔다. 가파른 경사에 위태롭게 설치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전망대로 향하는 모노레일까지 타면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2층 정자가 나온다. 정자 위에 올라 건물로 뒤덮인 대지를 바라보니 탁 트인 시야에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날 내 눈에 들어온 광역의 도시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 도시가 이렇게 컸었구나. 수십 년 동안 살았던 곳이지만 아직 내가 안 가본 곳이 많구나. 저기 멀리 보이는 동네의 카페에서 지금의 아내에게 이별 통보를 당해 질질 짰었지. 타지 사람이 내게 이 도시에 대해 얼마나 아냐고 물어봤을 때 과연 나는 이 도시를 모두 안다며 섣불리 답할 수 있을까?
높은 산자락에서의 추억과 이미지는 이제 사진으로 남았지만, 전망대는 나에게 미처 못다 한 말이 남아있는 듯했다.
"안녕, 근시안적인 안경을 두르고 사는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이 근시 안경인데."
"...... 내가 말하는 건 삶을 바라보는 너의 시야와 관점을 말하는 거였어."
"그래? 진작에 말하지. 왜 말을 빙빙 돌려."
"산등성이에 올라와서 도시 전체를 조망하니 느낌이 어때? 시야가 확 트이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내가 살고 있는 동네도 이 도시에 비하면 정말 작디작은 곳이라는 것도 느껴지고."
"내 얘길 들어봐. 멀리서 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어. 산속에 있으면 산의 구석은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산의 전체적인 웅장함이나 위상은 느낄 수 없게 마련이지. 산도 멀찍이 떨어져서 봐야 매끈하게, 유려하게 뻗은 웅장한 산등성이를 감상할 수 있어. 멀리서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어. 바로 높은 데서 바라봐야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야. 전망대에 올라야 도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듯이 말이지. 우리의 삶도 비슷한 이치야. 특정 존재나 이치의 진짜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선 주관이 임의적으로 꾸며놓은 심리적 거리감을 맹신해선 안 돼. 멀찍이 떨어져야 글씨가 잘 보이는 노안처럼, 산 정상에 서야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인생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객관적인 거리감과 일정의 높이가 필요해. 혹시 하나의 프레임 속에 여러 개의 사물들이 숨어 있는 숨은 그림 찾기 해봤어? 부분에 집착하면 단지 몇 개의 사물만 찾을 수 있을 뿐이고 결과적으로 과업은 실패하지. 근경에 골몰하지 말고 원경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해. 그래야 함의를 잘 찾을 수 있을뿐더러 세상을 보는 눈이 탁월해지는 거지.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 2.0이 되는 순간까지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