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의 처방전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통찰로 얻은 깨달음
무릇 외모지상주의란 관념이 이 시기를 비아냥거리며 관통하고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외모가 곧 그 사람의 능력이 된다는 거짓된 모순의 가면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국지 고사 속 유비가 봉추 방통을 처음 대면한 순간처럼 외모가 편견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비단 이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어찌 보면 보편적, 지배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인간의 잠재의식일 수도 있겠다.
직장에서 친한 동료로부터 못생겼다는 말을 진단처럼 농담처럼 가끔 듣는다. 처음에는 못생김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불결한 어감 때문에 학을 떼며 광분했다. 나보다 더 못생긴 게 어디서 감히 누구의 외모를 평가하냐는 생각이었다. 아마 영조 대왕이라면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귀를 박박 씻었을 터이다. 그만큼 못생김이라는 말은 못생긴 워드였다. 못생겼다는 말에 흥분한 나 역시도 어쩌면 외모지상주의에 편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못생김에 대한 자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유치하고 철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신은 공평하시니까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의 외모를 모두 똑같이 세팅한 후,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잘생김 쪽으로, 악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못생김 쪽으로 외모를 변화시켰으면 어땠을까는 자기 위안의 기제를 발현시킨 것이다.
어차피 이런 상상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공상이고 망상이다. 남들이 평가하는 내 외모를 내가 스스로 탓할 게 아니라, 날 낳아주신, 건강하게 낳아주신, 건강하게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먼저 전하는 게 옳은 일이다.
나라는 존재는 타인을 통해 형성되고 완성된다. 타인이 나를 완성해 줄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완성해 줄 수도 있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건 결함이나 상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누군가를 완성으로 이끌기 위해선 상대방의 결함을 메꿔주고 상처를 치유해줘야 한다.
칭찬과 긍정과 응원의 언어가 완성의 처방전이 될 거란 생각을 해봤다.
오늘 난 누군가를 칭찬하고, 긍정해 주고, 응원해 주기로 결심했다.
진정 잘생긴 사람은 외모가 아니라 타인을 완성해 주는 사람이다.
마음의 거울 앞에 선 내 자아가 오늘따라 잘생겨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