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의 반려 남편으로 살아가는 법. 열다섯 번째 이야기
전 고등학생 시절에 펜팔 경험이 있습니다. 국군 장병 위문편지가 아니라 이성과 나눈 진짜 손 편지 말이죠. 당시는 남녀 상열 지사적 분위기로 이성 간의 교제나 교류가 엄격했던 때였습니다. 심지어 학교 교칙에 이성 간의 교제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은 있었으나, 학교나 가정 분위기를 따져봤을 때 이성 간의 만남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이성을 사귈 능력이 없었거니와 자칫 이성과 만나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학교나 가정 차원의 엄한 징계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울면서 겨자를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책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비록 교과서가 아니라 소설이었지만요. 만약에 사랑에 빠진 대상이 오로지 교과서였더라면 서울대를 갔을텐데 안타깝습니다.
반 친구 모두가 저처럼 책과 연애를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학생은 선생님 몰래 아슬아슬한 연애의 외줄타기를 했었죠. 공부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연애 놀음에 빠진 친구들이 한심해 보였습니다. 수능이라는 인생의 대사를 앞둔 녀석들의 비밀 연애 행각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된 행동이라 여긴 탓입니다. 이성은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막상 대학에 들어가면 여자를 많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저만의 막연한 기대감은 대학 생활 내내 한 명의 여자도 못 사귀어 본 연애 무능력자라는 현실로 남긴 했습니다만...)
지독히도 안 풀리는 수학 문제를 앞에 놓고 골머리를 썩이던 평일 야자 시간, 옆자리 친구가 감독 교사의 시선을 피해 저에게 은밀한 쪽지를 건넸습니다. 공부는 하기 싫고 시간은 안 가니 또 쓰잘데기 없는 말을 썼겠구나, 싶은 마음에 성의 없이 쪽지를 열었습니다. 쪽지에 써진 내용은 칠판 지우개가 되어 제 머리속 칠판에서 방황하던 수학 공식을 싸그리 지워버렸습니다.
"야, 너 00여고 여자애랑 펜팔 안 할래?"
그 친구는 00여고 여학생과 실제 펜팔을 하던 중에 서로의 친구를 한 명씩 소개해 주는 일에 마음을 모았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연애를 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지친 수험 생활에 활력소를 만들자며 저를 설득했습니다. 학교 생활 규정을 들춰봐서 이성과의 펜팔에 관한 조항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애초부터 그런 조항은 있지도 않았을 거라는 낙관적인 합리화가 제 심장을 꼬드겼습니다. 매일 반복되던 기계 같은 삶에 염증과 권태로움을 느꼈던 차라 친구의 제안을 뿌리치기 힘들었습니다. 간접적이나마 이성의 세계가 궁금했습니다.
드디어 첫 편지를 받았던 날, 병무청에서 날아온 입영통지서를 뜯는 듯한 떨림으로 조심히 편지 봉투를 열었습니다. 봉투 안엔 여학생 특유의 아기자기한 감각이 묻어 있는 편지지가 두 번 접혀 있었습니다. 한 번 펼치고, 또 한 번 펼치니 봄 향기를 머금고 있는 글자의 세계가 나타났습니다. 단정하면서도 정갈한 글씨체에 그만 영혼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 이게 바로 여자의 글씨라는 거구나. 정말 신기하다. 심지어 아름다워.’
여자의 글씨체를 마주한 제 마음의 초원엔 비 갠 후의 선명한 무지개가 떠올랐습니다. 자연의 물감이 흩뿌려진 풀들은 상쾌한 바람결을 따라 한 방향으로 군무를 추었습니다. 낙원에나 존재할 법한 궁극의 향기가 제 코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그 여학생의 글씨체 하나는 제 마음에 하나의 별천지를 창조했고 그 한 가운데에 미지의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긴 머리에 하얀 톤의 피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대에 적당히 쌍꺼풀이 진 눈매, 그리고 생기가 도는 입술.
펜팔을 주고받을수록 여학생에 대한 판타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색과 질감, 부피를 더 해갔습니다. 어느새 제 마음의 방엔 사랑과 아름다움을 주관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입주해 있었습니다. 제 글씨도 동년배 남학생에 비하면 예쁘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기에 그 여학생 역시 제 글씨를 보고 일종의 다비드상을 그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교칙이고 나발이고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점점 또렷해지던 차에 제 마음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 놓은 그 여학생은 제게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을 건넸습니다.
‘우리 다음 편지에 서로 사진 교환할래?’
전력 질주로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도 아닌데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진을 뒤적거렸습니다. 비교적 최신 사진, 실제보다 더 잘 나왔다는 사기성 느낌을 주는 사진, ‘그래도 썩 괜찮은 얼굴인걸?’, 하는 일말의 가능성을 주는 사진. 스마트폰 카메라가 없던 시절이라 앨범에 꽂힌 인화 사진의 수는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찍은 사진이라곤 고등학교 2학년 때 다녀온 수학여행 사진뿐이었고 사진은 냉정하게도 제 외모를 100%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여드름 보정이 전혀 되지 않은 촌스럽게 생긴 남학생이 수학여행의 피로가 잔뜩 낀 기색으로 궁상맞게 서 있는 사진. 그나마 보낼 만한 사진으론 가장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잘생겨 보이는 사진은 도저히 찾기가 힘들었고(아니 그런 사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가장 덜 못생겨 보이는 사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그렇게 다음 편지턴에서 서로의 사진을 동시에 보내기로 약속했습니다. 편지 봉투 안에 사진을 넣으면서도 내심 불안했습니다. 아프로디테가 제 사진을 보면 분명 실망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기는 힘들었습니다. 빨간 우체통 안에 편지를 넣고서 그녀의 사진을 품고 있는 편지를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편지가 제게 당도했습니다. 편지를 열자마자 사진부터 확인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아프로디테는 어느샌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평범한 외모의 여학생 한 명이 대전 엑스포 공원 한빛탑을 배경으로 수줍게 웃고 있었습니다. 여성의 외모를 보고 실망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아득한 이상에서 엄정한 현실로 감각이 돌아왔달까요? 남자와 여자의 외모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제 얼굴에 비하면 그 여학생은 훨씬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한 편지지를 펼쳐 볼펜을 들었습니다. 사진 잘 받아봤다고, 웃는 게 이쁘다고, 그리고 약간의 가벼운 농담까지 곁들인 편지. 편지를 부친 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드름 충만한 촌뜨기의 사진에 실망했는지 28년 동안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안녕, 나의 아프로디테.
저는 아내와 연애할 때부터 손 편지를 써오곤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잘못 꺼내는 제 성향 상 진심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손 편지였습니다. 문자 메시지로 주고받는 흔한 ‘사랑해’는 왠지 감정의 남발 같기도 하고 기계에 내 마음을 의탁하는 것 같아서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사랑의 경도를 더해가며 눌러쓴 ‘사랑해’ 엔 돈 주고 살 수 없는 저만의 고유한 폰트와 진심 가득한 마음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결혼하고서도 전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엔 작은 선물에 편지를 곁들였습니다. 냅다 선물만 주는 것보다는 편지가 더 진심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내 역시 선물보다는 편지에 더 감동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기념일엔 선물 말고 편지만 건네 볼까요? 혹시 아내는 무엇보다 현찰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저를 주저하게 합니다.
28년간 오지 않은 답장은 실은 진작에 와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펜팔을 통해 그려 왔던 저만의 이상형이 바로 제 곁에 살고 있으니까요. 아내를 마주할 때 제 마음에 황홀한 무지개가 떠오르고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마음결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곧 다가오는 기념일엔 근사한 편지지를 사야겠습니다. 펜대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제 진심을 담을 겁니다. 사. 랑. 해.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더 어울리는 것 같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