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멀어지면 블루투스도 무용지물

한 여자의 반려 남편으로 살아가는 법. 열네 번째 이야기

by 이현기

직장까지 도보로 길게 잡아도 15분 거리라 운동 삼을 겸 MZ스러운 백팩을 걸머매고 젊은이 행세를 하며 출근을 합니다. 고된 출퇴근길을 함께 걸어가는 저의 유일한 길동무는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입니다. 가급적 출근길에는 유쾌발랄한 음악을 들으면서 출근의 공포감을 애써 억눌러 보지만, 퇴근길에는 뭔가 숙연하고 애절한 노래를 들으며 어깨가 축 처진 채 돌아오곤 합니다. 그만큼 저의 하루가 고단했다는 방증이겠죠. 아무튼 매월 결제하는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의 정기 요금이 아깝지는 않았습니다. 전라도 식으로 표현하면 그만큼 ‘오지게’ 듣고 있으니까 말이죠.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마도 겸양의 미덕이 몸에 밴 것 같습니다. 함께 식사를 할 때면 그릇이나 불판 위에 어중간하게 남아 있는 음식을 한사코 먹길 거절하며 상대방의 입속으로 들어가길 바라거나, 회식 후에 노래방에 갈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마이크를 양보하느라 바쁩니다. 저 같은 경우엔 상에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문화적 속설을 철석같이 신봉하여 가급적이면 마지막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그렇게 각고의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지금 아들만 둘입니다. 속설은 속설일 뿐...) 노래방에서는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아듭니다. 노래를 잘 부르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선제적인 매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노래방 제한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는데 이미 결제한 노래방 요금이 아까웠을 뿐입니다. 가성비를 따져봤을 때, 누가 됐든 시간 내에 ‘오지게’ 불러야 이미 지불한 돈이 아깝지 않은 것이라고 여긴 탓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노래방에 가면 무조건 흥을 돋우어야 한다, 누구나 알 법한 댄스곡이나 걸쭉한 트롯트로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 라고들 주장하지만, 전 생각이 조금 달랐습니다. 흥을 돋우고 분위기를 띄울라면 차라리 나이트나 클럽엘 가지 굳이 노래방에서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 것이죠. 결정적으로 노래방에 비치된 노래책에는 엄밀히 모든 장르의 노래가 고유의 번호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발라드를 불러도 위법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주로 발라드를 부르곤 했습니다. 합석한 지인들은 자기들 이야기하느라, 혹은 노래책을 훑어보느라 제 노래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굴하지 않고 기어이 애절한 발라드의 1절 후렴구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약간 뻘줌한 자세로 리모컨을 찾아 중지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제서야 지인들은 왜 더 안 부르고 꺼버리냐며, 마침 듣기 좋았는데 왜 그만 부르냐며 핀잔을 줬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엔 영혼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죠.


슬픈 발라드를 목청껏 부를 때마다 제가 감정 이입하는 대상과 상황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발라드가 마치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유일한 맥락. 그것은 아내와의 세 번의 이별이었습니다. 술로써도 극복이 안되었던, 친구들의 뻔한 위로에도 격려가 안 되었던 그 아픈 시절에 제 어깨를 다독여준 건 다름아닌 노래였습니다. 노래는 마치 저보다 더 처절한 이별을 겪어 본 그 누군가의 위로처럼 찢어진 제 가슴을 봉합해주었습니다.


‘너만 겪는 슬픔이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도 너 아닌 누군가는 슬픔에 젖어 있을 거야. 누구나 겪는 보편적 슬픔이기 때문에 혼자만의 상실감에 젖어 있을 필요는 없어. 이 또한 흘러가는 이별의 성장통일 뿐이야.’


멜로디에 맞춰 가사를 읊거나 부르짖는 가수의 목소리는 마치 저를 가까이 마주하고 ‘힘들지? 나도 힘들었기 때문에 네 맘 잘 알아’라며 나지막이 속삭여주는 듯했습니다. 노래를 들려주던 유선 이어폰이 없었다면 전 저 깊은 심연의 바닥을 향해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노래가 새어나오던 이어폰은 제 상처에 공감하는 누군가의 따스한 입술이었습니다.


어느덧 유선 이어폰은 무선 이어폰에게 바통을 넘겨주었습니다. 아내를 조르고 졸라 산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은 제 백팩 속 필수품처럼 언제나 가방 깊숙한 곳에 담겨 있습니다. 핸드폰 배터리 소모의 원인 중엔 블루투스 기능을 활성화도 포함되어 있어 저는 음악을 들을 때만 잠깐씩 블루투스를 켜두고 있습니다. 가끔 퇴근하면서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제가 귀가하는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를 준비할 요량이었던 거죠.


“여보 어디쯤이야?”

“응, 십 분내로 가.”

“얼른 와. 여봉.”


비록 노래는 중간에 끊겼지만 아내와의 통화는 마치 노래 속 가사에 섞인 사랑의 메시지처럼 감미롭기만 했습니다. 무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기 위해선 블루투스 기능을 켜야 하듯이 아내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도 마음의 블루투스를 켜두는 게 필요합니다. 다소 버퍼링이 있고 배터리를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마음의 블루투스를 꺼놓았다가 아내의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면 다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어느 정도 거리 안에서만 블루투스 기능이 활성화되듯이 마음이 멀어져도 블루투스 기능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아내와 최대한 마음을 밀착한 상태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그 가까운 마음의 거리에서 아내의 어떤 마음을 전송하는 지 귀를 바짝 세워야겠습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어디 한 번 들어볼까요? 음, 아이들을 씻겨 달라는 음성이 전해져 오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