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바속촉이 아닌 레어로 굽는 당신, 배려가 넘치십니다.
이베리코 목살을 먹다가 사소한 배려를 떠올리다.
오랜만에 지인들과 조촐한 식사 자리를 가졌다. 잘 숙성된 이베리코 돼지 목살과 삼겹살은 구워지기도 전에 하얀 접시 위에서 요염한 자태로 우리의 침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모임 자리에선 주로 내가 고기를 구웠지만, 이날만큼은 지인이 재빠르게 집게를 선점한 후 자기가 고기를 직접 구워주겠다며 나에게 안식년이 아닌 안식 시간을 부여했다.
스무 살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난 고깃집에서 남들에게 고기 구워주는 것을 참으로 좋아했다. 남들에게 고기 굽는 수고를 덜어주는 배려, 정성껏 구운 고기를 상대방의 접시에 놓아주는 배려, 누군가를 배려한다는 신념은 관계 지향적인 내 삶의 근간을 지탱해오고 있었다.
25년이 흐른 현재, 일만 시간의 법칙 덕분인지 난 자연스럽게 고기 굽기 장인이 되어 있었다. 기계적으로 시간을 재서 인공지능처럼 정확하게 고기를 굽는 건 아니었지만, 불판을 알맞게 데운 후 고기 위에 육즙이 서서히 피어오르면 반대쪽으로 뒤집을 준비를 서두른다. 반대쪽도 적당히 구워졌겠다 싶으면 가위를 대령하여 상대방의 미각적 취향에 따라 잘 익은 고깃덩어리를 때론 큼지막하게, 때론 조그맣게 차근차근 자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나오는 순간이다. 상대방이 고기에 대해 감탄사를 연발하면 육즙을 고기 안에 완벽하게 가두었다는 자부심과 고기 굽기 장인으로서의 자기애가 슬며시 찾아와 내 어깨높이를 슬쩍 올려 준다.
고기를 구워주겠다길래 지인에게 흔쾌히 고기 굽는 걸 맡겼는데 시어머니의 심정으로 날카롭게 지켜보니 굽는 모양새가 영 신통치 않았다. 너무 고기를 자주 뒤집어서 육즙은 서서히 메말라갔고, 덜 익은 듯한 고기가 내 접시에 놓여서 자신을 외면하지 말고 맛있게 먹어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소고기 레어도 내 취향이 아닌데, 돼지고기 레어라니. 돋았던 식욕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찌 보면 레어든, 미디엄이든, 웰던이든 중요한 건 고기를 익힌 정도가 아니라 내 수고를 덜어준 지인의 사소한 배려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사소함이 주는 가치를 놓치고 있다. 거창함이 주는 화려함에 조금씩 영혼이 잠식당하며 이젠 사소함 따위는 성에 안 찰 정도로 타락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다친 부위를 걱정해 주며 병원에는 다녀왔냐고 물어봐 주는 사소함.
신발 끈이 풀린 걸 알아채고 허리를 굽혀 손수 신발 끈을 묶어 주는 사소함.
정성껏 차려진 식사를 맛있게 먹고 정말 맛있었다는 말 한마디를 건네는 사소함.
식당에 입장해서 상대방을 위해 손수 수저를 놓아주고 컵에 물을 따라주는 사소함.
기념일에 건네는 비싼 꽃 한 다발이 아닌, 아무 날도 아닌 일상의 퇴근길에 사 들고 가는 싸구려 꽃 한 송이의 사소함.
우리 삶에 진정 필요한 건 사소함이 주는 배려일지도 모른다. 사소한 배려가 모이고 쌓이다 보면 우린 거창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