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체에는 척추 기립근으로 불리우는 근육이 있다. 뒷쪽 허리에 붙어있는 세로로 긴 근육으로 잘 발달되어 있으면 가운데가 움푹 패여있으며, 척추를 기준으로 한 몸통의 코어 근육이다. 언뜻 보면 잘 보이지도 않아 그 중요성을 무시하기 쉬우나 척추기립근은 척추를 지지하고 몸의 균형을 잡게 해주는 데에 필수적이다. 즉 몸의 줄기이자 기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몸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PT를 받는 것처럼 나는 정신에도 척추기립근이 있다면 이를 단단히 세우기 위한 점진적 과부하의 비용을 값비싸게 지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내가 바닥을 치고 한발한발 다시 내딛는 과정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변했다. 물론 타노스의 핑거스냅처럼 극명하게 삶이 바뀐 것은 아니다. 또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일 터이다. 하지만 동굴 바닥에 솟아있는 석순은 천장에 매달려있는 종유석에서 떨어진 지하수 한방울 한방울이 모여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생긴다. 내 마음이라는 동굴 속 깊은 바닥에 지하수 한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첫째,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안다. 내가 6살 때 천원마켓(오늘날 다이소)에서 1,000원짜리 조화 모형을 엄마에게 주려고 구매한 적이 있다. 엄마가 기뻐하실 생각에 혼자서 설레는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해 이를 엄마에게 들이밀자 돌아온 것은 엄마의 쓴소리였다. 1,000원이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무용한 것을 사오는 거냐고. 예상밖의 반응에 당시 굉장한 충격으로 남아있어 그 찰나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어린 자식의 선심과 이를 존중할 필요가 있는 부모의 가치 판단은 차치하고 보면 엄마는 1,000원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로 엄마는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절약 정신이 뛰어나셨다. 쓰지 않는 전등이 켜져있으면 집에 불이라도 나는 양 스위치를 항상 끄러 다니셨고 주방 서랍엔 10원, 50원, 100원, 500원 동전을 분류해놓는 상자에 동전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잔돈을 알뜰살뜰 모아 물건을 구매할때 활용하곤 하신 것이었다. 엄마가 1,000원이라는 사회적 합의에 누구보다 큰 가치를 부여해 오신 것처럼 나도 1,000원에 묻은 누군가의 피와 땀이 이제는 얼핏 느껴지는 것 같다. 초등학생이 손에 쥐어준 작은 쿠키 하나, 먼 길을 와줬다고 그 자리에서 천원이라도 에누리를 해주는 당근 판매자, 첫 월급을 받았다며 밥 한끼를 대접해주는 동생 등에게 느끼는 감사의 색채가 예전보다 짙어졌다. 감사라는 강이 있다면 이제 그 강은 호수가 되었고 이윽고 바다가 될 것이다.
둘째, 타인의 상처에 대해 초연하고 진심어리게 대할 수 있다. 새롭게 알게 된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손과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상대에게 이를 절대 들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짧지 않은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약 10초 간의 정적이 흘렀다. 인물의 솜털까지 클로즈업하며 슬로우 모션을 취하는 영화 장면처럼 시간이 느려진 듯 했다. 눈썹, 눈의 모양, 입꼬리 등을 보며 상대의 기분을 빠르게 캐치해내는 섬세함을 가진 나에게 그의 표정은 풀수 없는 미궁이었다. 특히 상대의 담담하고 잔잔했던 눈빛을 잊지 못하고 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던 나의 다짐이 상대에게 투영되었나 싶을 정도로 상대는 평온했다. 이후 상대도 자신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요약하면 부동산 사기로 나보다 큰 액수의 돈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결이 다른 잃음이었지만 그 사람은 '깨졌다','무너졌다','엎어졌다' 등의 비슷한 단어의 어감으로 우리 둘의 경험을 공통분모로 삼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사람은 내가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을 때, 나의 고통과 아픔에 깊이 빠져들어 나의 떨림을 진작 눈치 챘으리라. 설령 내가 떨지 않았다고 해도 감각으로라도 알았을 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무방비의 현실 세계에 내놓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을 알기에, 또 상대의 반응에 따라 당신의 감정도 요동칠 수 있음을 경험했기에 그는 10초 간의 정적 동안 심연의 사고를 했을 것이다. 사시사철 그 자리에 우뚝 서있는 나무처럼 부동의 반응이 최고의 위로라는 것을 깨달은 선배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위로를 건넸던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당신에게 용기 있게 보여주었을 때, 당신은 어떤 자세와 태도로 그 상처에 반응할 것인가? 난 그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어렴풋이 배웠다.
셋째, 부정적 감정의 역치가 높아졌다. 완벽주의적인 성향으로 살아온 나에게 약간의 부정적 감정은 종이에 서서히 젖어 퍼져나가는 수채화 물감처럼 그날의 기분을 서서히 물들여갔다. 젖은 종이는 곧바로 마르지 않았기에 이를 떨쳐내는 방법은 내겐 미지의 영역이었고 젖어버린 나의 기분은 태도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감정에도 내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바닥을 치며 느낀 아주 선명하고 빽빽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트레이닝과도 같았다. 이보다 더 큰 정신적 고통이 아직까지는 찾아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 마음 속의 부정적인 감정이 아지렁이처럼 일렁이며 피어오를때 이를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듯이 말이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바닥에 엎드려 질질 짤만큼 힘들고 불편한 감정은 아니잖아.'
정신의 척추기립근.
내 정신의 근성장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