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속 장애
종이 봉지 공주
글 로버트 문치 / 그림 마이클 마첸코
비룡소
1998
위를 봐요!
글그림 정진호
현암사
2014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지난 주 그림책 테마 여행은 어떠셨나요?
오늘 아홉 번째 그림책 여행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해보려 합니다. 바로 한 가지 관점으로 두 가지 책을 살펴보는 것인데요. 선천적 뇌성마비로 태어나 수 차례의 수술을 거처 다리를 저는 장애인으로 살아온 어맨다 레덕(Amanda Leduc)이 쓴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에서 드러난 '장애'에 대한 그의 시각을 그림책을 읽는 법에 적용해보겠습니다. 그는 동화책에서 장애가 존재하던 것의 상실 혹은 결핍으로 표현되며, 극복할 수 있는 시련으로 상정되는 것은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자 불합리함이라 꼬집습니다. 특히 수많은 동화에서 그려진 장애에서 비장애로 변화하는 마법적 요소가 의학으로 극복될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함께 할 여행지는 그의 책에서 언급되었던 <종이 봉지 공주>와 한국 남성 작가 정진호가 그린 <위를 봐요!>입니다. 두 작품 모두 장애(결핍)를 가진 여성 주인공을 다루고 있지요. 주인공들이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었는고 그래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평소에 읽는 방식과 조금 다르게 먼저 두 작품을 병치하여 '상실로 인한 장애'라는 키워드로 드러나는 내용을 보고, 두 주인공을 분석하며 독자가 전달받을 메시지를 읽어봅시다.
첫 번째로 <종이 봉지 공주>와 <위를 봐요!> 모두 장애는 주인공에게 후천적인 요소이며, 존재하던 것의 상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 결이 다른데요. <종이 봉지 공주>에서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장애는 용이라는 악역이 준 시련입니다. 그가 살던 성과 옷을 몽땅 태우는 상실을 엮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입을 것이 없어 입게 된 것이 종이 봉지입니다. <위를 봐요!>는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육체적인 사고로 인한 장애를 말합니다. 주인공인 수지는 가족 여행 중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잃어 휠체어를 타지요.
두 주인공의 장애(결핍)는 어떻게 이야기를 진행시킬까요?
먼저 <종이 봉지 공주>의 엘리자베스입니다.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한 종이 봉지 공주 엘리자베스이지만 왕자를 구하는 데에는 특별한 장벽은 없어 보입니다. 상실된 요소와는 다르게 그의 명석함과 지혜는 동일합니다. 그는 꾀를 내어서 용을 지치게 하고 약혼자인 왕자를 구해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기존의 것(부와 아름다움)의 상실에 대한 왕자의 태도뿐이지요. 특히 아름다움의 상실이라는 장애적 요소를 극복하지 못한 엘리자베스에게 왕자는 아름다워지길 요구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런 왕자를 질책하고 결혼하지 않으며 종이 봉지를 입은 채로 자유롭게 다시 길을 떠납니다.
<위를 봐요!>의 수지는 어떨까요? 수지는 휠체어를 타게 된 후 집안에서만 지내는 것 같아 보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바라며 계속 묵묵히 밖에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만 볼뿐입니다. 드디어 한 남자가 수지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그 남자의 호의로 사람의 머리 위가 아닌 앞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남자의 의도를 알고 동참해준 사람들은 수지의 눈높이에 맞게 그가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위를 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후, 이야기는 수지와 그 남자가 벚꽃잎이 떨어지는 곳에서 함께 위를 보며 마무리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주인공의 장애와 주변 인물 특히 남성과의 관계로 의미를 살펴보지요.
용의 시련 전, 엘리자베스에게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공주라는 지위, 부, 아름다운 옷, 약혼자인 로럴드 왕자. 어느 날 용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지만, 사지육신 멀쩡하며 용을 무찌를만한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왕자가 공주를 구한다는 가부장적 동화 서사를 반전한 공주가 왕자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지혜와 용기, 독립성을 보여줍니다. 어맨다는 <종이 봉투 공주>를 사회의 성역할을 해방시킬 뿐 장애에 대한 해석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왕자의 말과 함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멘다의 저서 속 장애와 의학 모델의 연관 관계에 따르면 '의료는 장애인의 신체를 치료하여 장애인의 삶을 개선한다'라고 명시되어있습니다. 이 해석은 엘리자베스가 상실한 미(美)와 사회가 추구하는 미(美)로 넓은 범위에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미디어와 매체는 지향할 만한 외모를 가진 자의 성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외모를 가진 사람, 특히 여성이, 의료적 행위를 통해서 자발적으로 개선할 것을 암묵적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가 직접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여성을 장애를 가졌다고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추한 외모 혹은 기준에 만족하지 못한 외모를 가진 자를 결핍되고 불완전한 존재 여겨, 경제적 이익은 물론 비난을 포함해 폭력까지 불공정한 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음을 자주 보여주지요. 그러하기에 사회적인 의미에서 여성의 아름다움 결핍은 능력 부족과 연결됩니다. 이로인해 여성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자연 상태의 몸을 성형, 다이어트, 미용 등으로 결핍을 제거해 사회적 기준의 미를 획득하는 것이 행복한 삶과 자신의 권리를 찾는 일련의 과정으로 포장되어 여성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자 여성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끔 하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엘리자베스의 '미(美)'의 상실은 부와 명예의 상실과는 다르게 특수한 의미로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장애의 획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의 상실과 회복의 예는 다른 고전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씨 부인전>에서 박씨 부인은 신선의 딸이며 훌륭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추하기 때문에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했을 때에야 사랑을 받고 행복한 '여자'의 삶을 살게 되었지요. 하지만 <종이 봉지 공주>의 끝은 미의 회복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 자체를 장애로 여기지 않으며, 여성에게 미의 상실 또는 부재가 결핍이 아닌 본연의 상태로서 자신의 독립성과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이에 반해 <위를 봐요!> 속 수지의 장애는 육체적 기능인 걷기 능력 상실의 장애입니다. 텍스트에서는 다리를 잃었다고 했지만 그림에서는 발이 계속 등장하므로 물질적 다리가 아닌 걷기 능력 상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수지는 집에 계속 머무르며 창 밖을 바라보지만, 자신을 봐달라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스스로 밖에 나간 적 또한 없기에 수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됩니다. 그는 그저 하염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는 갇혀있다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수지야, 밥 먹어야지.'라는 문장은 수지에게는 돌보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나타냅니다. 수지가 항상 창 밖의 사람들을 보며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고 있지만 그의 보호자는 어째서인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습니다. 그림이 흐려지고 어두워지는 것을 통해 보호자의 잘못된 보살핌 속 수지는 소외감을 느끼고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음이 묘사됩니다. 그러다가 그를 발견하는 남자가 등장하고, 남자가 변화시키는 시각을 통해 수지는 정신적 고통의 해소를 느끼며 그와 함께 밖에 있는 것을 행복으로 느낍니다. 하지만 수지가 드디어 밖으로 나간 그 장면에서 그와 남자 단 둘이 위를 올려보고 있고, 사람들은 다시 여느 때처럼 무심히 앞을 보고 걸어갑니다. 세상이 바뀌었다라기 보단 자신을 위해 또 시선을 바꿔 줄 수 있는 남자와 함께 하는 수지가 행복할 뿐이지요.
이 서사는 탑에 갇힌 공주를 구출하는 용사의 이야기와 닮아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공주는 탑에 갇혀있고 그 스스로는 탑 밖으로 나가려 노력하지 않으며 언제 올지 모르는 용사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마침내 용사가 공주를 발견하고, 공주는 탑에서 자신을 꺼내준 용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말이지요. 수지가 보고 싶은 세상을 보여주며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용사는 일시적인 환상(다른 시점으로 살고 있는 장애인을 위해 사람들이 길에 서있는 것이 아닌 누워있는 것)을 보여준 것이지 실질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남자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는 표현을 통해 수지는 자신이 직접 세상으로 나왔다라기보다는 구원자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해석됩니다. 또한 분홍 빛깔로 약간의 채색된 배경 속 위를 올려보고 있는 두 사람은 수지처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다른 장애인에게 '너도 너의 사랑을 만나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하지만 같은 페이지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장애인인 수지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전처럼 무심하게 지나쳐가는 사람들입니다. 그에게 꿈과 같은 앞면을 보여주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제 수지에게는 수지의 용사인 남자만이 옆에 있을 뿐이지요. 이 책에서 수지의 행복은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도 아니고, 갈망하던 사회로의 새로운 출발도 아닌 사랑입니다. 자신을 밖으로 내 보내주지 않던 원 보호자에서 자신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줄 다른 보호자로의 이동. 이 속에서 수지는 자기의 의지대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종이 봉지 소녀>를 통해 여성이 용기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사랑이 아닌 자신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 말이지요. 엘리자베스가 겪은 시련인 미의 상실, 사랑의 부재는 제거하고 변화되어야 하는 결핍이자 장애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위를 봐요!>에서는 작가는 독자의 시점을 수지와 동일하게 위에서 보는 위치에 두지만, 독자가 비장애인이라면 수지의 시점에 공감하는 것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이 됩니다. 그리고 독자는 제3자의 입장에서 작가가 전하는 사랑은 장애도 뛰어넘을 수 있고 사랑을 통해서만 여성 장애인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고리타분한 메시지를 읽게 됩니다. 수지와 같은 휠체어를 탄 소녀도 이 책을 통해서는 작가가 표현한 수동적이고 납작한 장애인 여성 이상을 꿈꿀 수는 없겠지요.
소수자와 함께 하는 사회는 소수자를 사랑의 대상이나 호의를 베풀어야 대상이 아닌, 그들의 존재와 다름을 인지하고 동일한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다수자의 호의와 인정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닌, 다수자들처럼 안전하게,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함께 어울리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일 테지요. <종이 봉지 공주>와 <위를 봐요!>로의 여행은 서로를 이해하고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