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킨데르다이크, 로테르담 & 벨기에 - 안트베르펜
나는 전설이다 세트장과 모래밭의 화가
뒤스부르크에서 하루 쉬어가는 날. 잠을 푹 자고 일어나 느긋하게 체크아웃을 했다. 뒤셀도르프로 넘어가려는데, 아내가 폐제철소를 공원으로 개조한 란트샤프트 파크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숙소 앞에 현지 유치원이 있길래 아이를 잠깐 놀게 해주고 싶어 물어봤지만 규정상 단칼에 거절당했다. 독일 유치원의 철벽 수비에 K-아빠의 정이 안 통하네. 끙. 아쉬웠지만 정작 딸은 쿨하게 괜찮다며 앞장선다.
40분 정도 운전해서 도착한 폐제철소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녹슨 거대한 철구조물들이 얽혀 있는 게, 당장이라도 윌 스미스랑 좀비가 튀어나올 것 같은 세기말 영화 나는 전설이다 세트장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고철 덩어리도 이렇게 훌륭한 관광지가 되는데, 우리도 빈 공장 하나 힙하게 개조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아이가 놀 만한 곳이 안 보여 아쉬워하며 나가려던 찰나, 차창 밖으로 거대한 놀이터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독특한 놀이기구에서 아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놀았다. 떨어지는 가을 낙엽도 잡고 뛰노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빡빡한 행군 일정 속에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다. 조금 더 걸어가니 더 넓은 모래 놀이터가 나왔다. 아이가 모래밭에 쭈그리고 앉아 꼬물거리길래 뭘 하나 봤더니, 지금까지 우리가 다녀온 여행지들의 랜드마크를 하나하나 그리고 있었다. 부르즈 할리파, 콜로세움, 쾰른 대성당... 아빠 엄마 따라다니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 풍경들이 예쁜 머릿속에 다 기억되어 있구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리들 마트에 들러 며칠 치 식량을 든든하게 쟁였다. 밤에 숙소에서 다음 일정을 짜다가 문득 구글 타임라인 기능이 생각나서 켜봤다. 지도 위에 우리가 지나온 궤적이 쫙 뜨는데 가슴이 웅장해진다.
아우토반의 마지막 질주와 암스테르담 P+R 주차 방어전
다음 날, 암스테르담으로 출발했다. 국경을 넘으니 표지판이 네덜란드어로 바뀐다. 속도 무제한 구역이 끝나기 전, 독일 아우토반에서의 마지막 질주를 즐겼다. 안녕, 독일. 내 인생에 언제 또 과태료 걱정 없이 합법적으로 폭주 뛸 날이 있을까. 원래 뮌헨에서 끝날 줄 알았던 여정이 쾰른을 거쳐 네덜란드, 벨기에까지 이어졌다. 어느새 우리 가족의 유럽 투어는 10개국으로 스케일이 뻥튀기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는 길이 정말 잘 닦여 있었다. 암스테르담 시내 주차비가 피도 눈물도 없이 악명 높다길래, 외곽의 P+R(Park and Ride) 주차장에 차를 댔다. 주차하고 대중교통 티켓 3장을 샀는데 고작 7유로다. 시내를 둘러보고 돌아와서 주차비를 정산하니 6유로. 주차장과 교통비를 합쳐 단돈 13유로에 그 비싼 암스테르담을 방어해냈다. 완벽한 가성비 시스템이다.
운하가 흐르는 암스테르담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며 아내가 추천한 레지스탕스 박물관에 갔다. 아이도 즐길 수 있는 체험 거리가 꽤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트램을 타고 안네 프랑크의 집으로 향했지만 예약을 안 해서 입장은 불가했다. 유럽 놈들의 예약제 횡포에 부딪혀 아쉬운 대로 문짝 앞에서 인증샷만 남기고 마데(Made)라는 소도시까지 쭉 운전해서 내려갔다. 도착한 집은 놀랍게도 낭만적인 진짜 벽난로가 있었고 공간도 매우 넓었다. 침실이 2층이라 내 연골이 조금 고생하는 거 빼고는 운치 면에서 합격이다. 내일은 하루 만에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 간다.
네로의 파트라슈, 그리고 12유로의 선택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정들었던 집과 인사하고 킨데르다이크로 향했다. 내가 꽤 기대하던 곳인데, 흐린 유럽 하늘 사이로 오랜만에 쨍한 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거대한 풍차들이 늘어선 풍경과 산책로가 예술이었다.
이어서 도착한 로테르담. 사실 나는 별 관심이 없었고 철저히 아내의 픽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큐브 하우스 같은 독특하고 기하학적 건축물들이 꽤 재밌었다. 내 눈엔 저거 청소는 어떻게 하지 싶었지만, 네덜란드 명물 감자튀김을 씹으며 가볍게 찍먹하기 딱 좋은 도시였다.
드디어 국경을 넘어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입성했다. 이곳 숙소는 유럽 시가지 특유의 전통 가옥이었는데, 이게 낭만은 있지만 현실은 지옥이었다. 주차장은 밖에 있고, 건물 계단은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가파른데 우리 방은 꼭대기 3층이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올라가는데, 하체 단련 안 해뒀으면 여기서 허리 디스크 터져서 여행 조기 종료할 뻔했다.
후딱 짐만 던져놓고 걸어서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갔다. 어릴 적 만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와 파트라슈가 죽기 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그림이 있는 바로 그 성당이다. 성당 앞 바닥엔 네로와 파트라슈가 덮고 자는 조각상이 있었고, 만화의 향수를 찾아온 일본인 관광객들이 유독 많았다.
그런데 성당 입장료가 1인당 12유로(약 1만 8천 원)다. 가격표를 본 아내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가성비 모드를 켜더니 비싸서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명화 구경에 12유로를 태울 순 없다는 굳은 의지. 다행히 아이는 만 12세 이하라 무료입장이 가능해서 결국 나와 아이 둘이서만 성당에 들어갔다. 네로가 목숨과 바꾼 루벤스의 명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고 압도적이었다. 아내도 눈 딱 감고 12유로 투자해서 볼 만한 가치가 있었는데 밖에서 기다리는 게 짠하면서도 아쉽다.
하지만 짠한 마음은 5분도 안 갔다. 구경을 마치고 아내가 벼르고 있던 와플 가게로 갔는데, 성당 입장료 12유로는 단칼에 아끼더니 와플 앞에서는 지갑이 자동문처럼 열렸다. 역시 내 아내답다. 예술은 배를 불려주지 않는다. 한 입 먹어보니 왜 벨기에 와플 하는지 알겠다. 자본주의와 식욕 앞에선 루벤스도 어쩔 수 없지. 너무 맛있어서 추가로 더 시켜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쉬는데, 아내와 아이가 나란히 앉아 윤아가 나오는 넷플릭스 로맨스 드라마를 본다. 초등학교 입학도 안 한 쪼그만 녀석이 벌써 로맨스 드라마의 서사를 이해하는 건가. 네가 사랑을 알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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