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가야 할 길, 순응의 길
[ 미련 두고 온 계절/ 고독을 아시나요/동그라미/갈대/거기로 향한 까닭 ]
미련 두고 온 계절
무엇이기에 투명의 빛을 퍼트리고
보일락말락 하냐며 물어볼 일이건만
머뭇거리다 흐느낌도 한두 번으로 족한데
자질구레 넘긴 변명이 말 같지 않아
꼴사납게 거슬려 측은스럽다
움츠린 어깨너머 어두운 그림자 따라
터벅거리는 발자국 사이
고뇌 서린 사색도 즐겁다지만
근원 모를 토막 난 망상들 잔재주 부리고
우러러 하늘 가장자리 꿈의 나랠 잊었나
자욱이 나린 안개꽃처럼
장막 가린 무대 뒤꼍으로 슬픈 설움에 노래
하얀 이슬 맺힐 저 먼 날의 자화상이여
보람 찾아 헤맬 필요를 모르는 시절
기다리다 지친 추태가 밉살스러울까?
꾸밈없는 투박함에 구수한 향내 드리우고
주저앉을 몸놀림에 발맞춰
춤을 추자던 젊은 날에 다짐이여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질 사연이야 많겠지만
부풀어 오른 풍선에 두둥실 띄워라
망설이는 심정이야 오죽하랴만
미련 두고 서성이기엔 너무 늦은 계절
지쳐 쓰러질 그 날까지
피와 땀 내음에 얼룩진 불모지를
힘찬 노래로 알차게 다듬어라
[ 고독을 아시나요 ]
꿈속에 그려지는 그림자
광고모델의 맵시처럼 현혹스러워요
가지런히 다문 입술 사이로
의미 짙은 미소 흐르고
무엇을 주시하는 눈동자이길래
요렇게도 영롱(玲瓏)하냐며
다그쳐 물어도 냉가슴인 것을
그저 수수한 사연이라면
애당초 슬프지는 않을 게고
소리 다듬어 울어야 속이 풀릴 거여요
허전함이 깃든 공간 사이로
외로움이 요란스레 느껴질 때
함께 거닐던 오솔길이
불현듯이 무척이나 그리워요
낙엽은 발걸음 자국마다 아우성치고
살결을 후비는 스산한 바람에
힘겨운 어깨를 떨구면
문득 미로 같은 영상으로
감미로운 전율이 용솟음쳐간
뒤안길이 애처로워 그저 바라보았죠
거기엔 마지막 쓸리어질
잎새만이 홀로 울고 있어요
을씨년스레 깃든 이 계절에
방황하는 작은 별 하나
깜박이는 가로등 되어 서성이고
호젓해 서글픈 시인은
허공의 철새처럼 둥지를 잃었어요
황혼이 짙어 오는 예배당
십자가에 땅거미 깔리고
산사의 독경 소리 은은히 들려오는데
그대는 아시나요 쓸쓸함을
[ 동그라미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그라미 하나
작은 조금 더 작은 동그라미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점점 작은 아주 작은 동그라미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동그라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미로를 누비는
내 생애의 무한히 조그마한 동그라미 하나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건만 왜!
무슨 까닭으로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느냐고 묻지 않으렵니다
[ 갈대 ]
외줄기 갈림길 기로(岐路)에 선
삼각주(三角洲) 후비진 늪지대
무리 진 철새 날아드는
땅거미 질 녘
노을 사이로 늘어선 그림자
태고(太古)에 얽힌 사연(事緣)
고스란히 묻어두고
홀연히 맴도는 역동(力動)의 세월(歲月)
모진 지조(志操), 슬픈 날에 간직하고
기다리다 지친 갈대의 순정(純情)
님 소식(消息) 전해올까?
바람결에 흐느적거리는 마음
님 향한 그리움
여울진 사랑
石榴의 속살같이 아름답게 익어가리
[ 거기로 향한 까닭 ]
누군가 힘주어 의문을 가지더이다
왜 여기에 왔느냐고 말입니다
그래, 마음이 머물러 맴돌아
혹시나 하고 미련 두었다 했지요
생각은 생각 속에 생각을 잉태하듯
심중으로 통하는 고리가 있어서
그렇게 실낱같은 정붙이기로
아우러짐이 좋아서라 설하였지요
어쭙잖은 자리를 잠시나마 털고서
내가 거기로 향한 까닭은
탈바가지 패대기치려 안달이 난
미련한 갈망을 찾아보려 함이지요
세태가 그러하다고 탓하자니
들풀의 꾸지람이 귓전에 맴돌아
이게 아닌 데라는 낌새라서
오롯이 그곳에다 방점을 두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