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나온 시간/심판/가야 할 길/무엇이 …/가을날/흐르는

3부 : 가야 할 길, 순응의 길

by 김덕용

[ 지나온 시간/심판/가야 할 길/무엇이 되어/가을날/흐르는 시간 ]


지나온 시간

어스름히 서려 있는 발자국 사이사이엔

다시 갈 수 없는 지나온 시간이

살아온 내 노래를 부르라 한다


인연의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져

뜨거운 가슴으로 인간미 맛을 들여놓으면

화사하도록 눈부시게

보이지 않는 미끼를 드리워

지친 나를 맞이해줄 포근함이

가던 발길 멈추라 한다


자욱한 안개 타고 쪼끄만 햇살 나리면

짧다 못해 길게 늘어선 꿈이

조금씩 커지는 심장으로

줄기찬 화음을 전수하여 오고

창공으로 날아간 바람들이

회오리 되어 낚아채지는 가녀린 소망이여


심지도 없는 뿌릴 뽑아

거리낌 없이 휘휘 내저을 것을

눈여겨볼까 두려워라

의문의 넋을 건져 살아볼 일이거늘

가없는 측은함에 누가 되어 서성일 제

가파른 맥박으로 밀리어 드는 고통


아! 또렷이 보았습니다

어스름히 서려 있는 발자국 사이사이엔

다시 갈 수 없는 지나온 시간이

살아온 내 노래를 부르라 한 까닭을






심판

스산한 바람이 살결 타고 일다

먹구름 일렁이어 진한 어둠을 뿌리고

뿌연 땅거미가 숨통을 조여왔다


맑고 포근한 햇살 저편으로

차곡차곡 가슴을 누르는

앞뒤조차 분간 못 할 저질스러움이

쓰라림도 모르게 아픔도 없이

은근히 시들어가게 한다


어차피 매몰차게 짓이겨질 일이라면

한 번쯤 돌이켜봄직도 하건만

가슴앓이 말 못 할 사연인 것을

어이하면 좋다더냐


지칠 줄 모르는 너의 모순이

아차 하는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가증스러운 세 치 혀가 녹아나고

재미 붙인 짭짤한 미소도

당연히 여겨질 끼가 많은 처지로구나


풋내 날리는 허세가 색색이 드리워진

花蛇처럼 華奢한 유혹으로

어지러움에 버림받은 우상이여


이제는 참지 못할

시달리어 빛을 밝힐 정의의 사도로써

심장으로 치닫는 분노의 씨를

조곤조곤 들추어서 뿌리노라

질책을 위한 자체의 심판으로






[ 가야 할 길 ]

묵은 어깨를 털면

자유로운 움직임이 부산할까?

어제와 오늘은 하늘과 땅

무시되어버린 수 개월간의 작은 테두리에서

좁은 공간을 털고

속박된 몸뚱이를 조심스레 일으켜 본다


추구해야 할 천직이 무엇이라고

낙점을 찍어 밝힐 수 없음이

아직 설익은 과일처럼

풋내 날리는 미숙한 젊음 탓인가?


시선 둘 방향조차 모르면서

서둘러 재촉하는 어설픈 모양새가

바보스러워 보기 흉하고

그렇다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는 이 마당에

그대로 주저앉아

푸념만 털어놓을 수도 없음이

앞으로 가는 것만 못하지 않을까?


잡다한 만물상 진열대같이

틈새기도 없는 온갖 일거리 중에

이거라 못함은 무슨 연유일까

양손에 힘을 몰아 쥐는 뿌듯한 체온도

여태껏 못 느껴 보았던 것은

후련하리만치 가벼운 몸놀림이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일까


그 전날에 하다 멈춘 수습일랑

계속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하고자

끼우뚱거리는 걸음걸이 가지런히 모으고

어느 골에나 있을 흔한 잔일들을

살그머니 해치우고 사라지는

뜨내기 청춘이라도 좋다


지나온 뒤안길 모퉁이에서

회심의 미소 짓는 얼굴 볼 인생길이

여기 이 터전으로부터 가야 할

나의 길이 되리라






무엇이 되어

무엇이 되어 이 자리에 설까?

참다운 내 모습도 모르면서

거짓부렁이 허울만 감싸는

가련한 꼴이 몹시 보기 흉하구나

감칠맛 나는 추악한 독선이

가을날 비 온 뒤의 안갯속 같아서

분간조차 못 할 써늘함이라

그저 씁쓸히 미소로 대신한다


함부로 마주할 수 없는 체면들이

양심보다 거칠게 날뛰고

하나둘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조잡하리만치 엉성한 허영을

저 거울에 비추어 보아라

누구이냐고 의아해하기 전에

자신을 떳떳하게 만들어 보지 않을래

하나뿐인 육신의 영혼을

조금 더 건실하게 가꾸어 보렴


웃음을 모르는 어두워진 가슴에

후회 없는 오직 한마디

이것이 나의 전부라고

조금 치의 가식도 없이 밝힐 때

한 걸음 두 걸음

이마엔 땀방울 송알송알 솟아나고

부끄러워 않을 밝은 얼굴에

환한 기쁨이 어우러져 춤을 춘다

그래 이제 알았구나

무엇이 되어 이 자리에 설까를






가을날

국화 향기 그윽한 들녘

수수깡이 길게 늘어선 하늘가에

참새떼 옹기종기 날아들면

허수아비 방긋 눈웃음 지었다


누런 물결 드리운 햇살 저편으로

탐스러운 밤알이 벌고

대추가 불그스레 익어가고

박은 추녀 끝에 얹혀 영급니다


붉게 물들어가는 황혼 사이로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하고

그래서 더욱더 아름다워 보이고

가-ㄹ은 한층 무르익습니다






[ 흐르는 시간 ]

뜻대로 살지 못함이 세상일인 까닭에

시간이 흐를수록 아쉬운 나날이여

어쩌면 끼 많은 아이의 다기를

교묘하게 짓이겨 놓았을지도 모를 일로써

보이지 않는 눈물이 왜 마음을 적실까?

광채를 꺼릴 이가 어디 있으랴

억지로 만든 어둠 속 장벽도 아니련만

가깝게 느껴지는 거추장스러운 처세들이

무엇으로부터의 시발점이었을까

이루어놓고야 말겠다던 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지금에 와서

어찌할지 모르겠다 할 정도가 되었더라도

모든 게 사람 손에 달린 일이라면

무심히 그냥 지나쳐 버리겠는가?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자 해도

주저까지 할애할 처지는 아니고 보면

발산 못 할 것도 없을 패기는

젊음의 우상으로 가슴속 정수리에 얹고서

일그러진 이마에 잔주름이 가시도록

활력에 불꽃을 피워라

keyword
이전 11화춘풍이 불면/차창 너머/그러합디다/찻집/젊은 합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