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가야 할 길, 순응의 길
[ 혹여 모르겠어요/순응의 길/군령지대/보이느냐/향수/빈촌의 삶 ]
[ 혹여 모르겠어요 ]
노을 한 아름 가만히 보듬고서
떠나가는 나그네의 옷섶이
파르르 떨림은 어인 까닭인가요
그저 그렇게 세태에 묻어가는
삶의 한 자락에 허한 마음 두고서
비껴가야만 하는 설움 아십니까?
눈길 저어 하소연도 부질없는
그런 연민이 애타는 정으로 남아
아련한 형상 속에 서성입니다
내키지 않는 어설픈 행보이기에
마치 죄인인 양 고개 떨구고서
눈물 어린 은혜 속에 머물렵니다
혹여, 비라도 하염없이 내리면
의지조차 버거운 사랑 얹고서
냉가슴만 쓸어내릴지 모르겠어요
[ 순응의 길 ]
어느 골로 흐르시나이까?
태초의 신비로운 자태를 머금고
그저 묵묵히 흐르는 물
고귀한 한 방울의 이슬로 시작하여
앙증스러운 고랑을 만들고
맑고 아담한 시내가 되고
부드러이 온화한 강을 이루고
깊고 넓은 바다를 펼칩니다
당신은 이치를 따르는 선각자
나의 꿈을 인도하는 스승과 같고
모든 진리의 상징이어라
[ 군령지대 ]
매사에 아쉬움을 남긴 젊음이
입소의 능선을 넘으며
파리한 두려움 혈맥 속에 무늬 이루니
고요한 숨소리 거칠어지고
이제 님의 군령지대에 들어선다
하나둘- 셋 넷 …
오직 임을 향한 키 작은 청년은
군 번 없는 훈련병이로소이다
힘찬 군가에 함성 드높고
절도 있는 군화 소리는 깎인 절벽 같다
너와 나의 만남이 전우 되어
이리도 듬직한 무궁화 되었구려
이제는 아스라이 스러져가는 슬픈 청춘
무지로 어설펐던 생명체로부터
인생 세간이 되기 위한
어제의 번뇌를 해탈하고자
내일의 오늘을 그려 나가는 젊음아
너는 막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스물네 해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앙상한 몸뚱이에 살찌운 사상이여
찌든 삶에 깃드는 정열이여
야생마가 핵으로 치닫는 것은
영혼이 심장에 영글어 가는 조짐인가
[ 보이느냐 ]
명주실같이 까칠한 성깔 부리며
살그머니 다가서는 바람이여
고요히 스치리라 다짐해온 가을날이
급하다고 소리치는 사연은
가련히 시들어갈 단풍 때문인가
되돌아갈 여유조차 없이
너무도 냉정히 꺼꾸러져 갈 낙엽처럼
쓸쓸히 나부끼는 마음의 추(秋)여
바삐 움직이는 삶의 거울 앞에서
남기고 싶은 여운 속에
새로운 생명체를 간직하고 싶어
하염없이 추락해 들어가는
처진 어깨를 추켜세우고
조심스레 쓸리어지는 잎새를 밟으며
목화솜처럼 포근한 안식을 찾아
조촐한 사당 거리의 책자를 뒤적인다
아무도 아는체하는 이 없이
냉정하게 뿌리치어지는 손길들이
호주머니 속으로 숨어버리고
살판나는 세상 자연스레 흥청거리며
조금만 더
서운하다고 보채는 세인아!
겨울의 혹독한 소리가
산등성이에 걸려있는 것이 보이느냐!
향수
떠나온 이들의 고향이 그러하듯이
마음 가득 푸른 꿈이 서리고
평야의 포근함을 즐거이 누리던
어린 시절 영원한 그리움의 터전이어라
어렵게 찾았건만 맞이하는 이 없고
쓰러져가는 초가만 푸념 없이 반긴다
마당엔 무심한 잡초가 살판났고
장독대엔 된장 내음 풍기는 듯하여
나는 포로가 되어 회상에 잠긴다
비바람으로 이엉엔 골이 파이고
마침내 사라져버릴 고가처럼
추억의 한 부분으로 자취만 남겠지만
말없이 이별 건네며 떠나던 날도
오늘이 있으리라 상상도 못 했었다
감회 깊은 정감에 젖어 돌아보는데
마치 엄니의 품속같이 자애롭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지난 사연 여운으로 남기며 나설 때
굴뚝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문득 말없이 배웅하는 둥지 같아
애틋함에 겨워 한참을 서성이고도
돌아서는 발길이 가볍지 않아
또다시 멈추고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 빈촌의 삶 ]
눈물을 머금고 사는 이의 아픔
씁쓸한 한숨을 삼키다가
목놓아 울부짖는 객지살이 여로여
믿음의 잔재는 넋 잃은 소망으로
근근이 이어가는 운명이려나
희망을 품은 가난의 굴레에서
몸부림치는 삶의 애환이
삭막한 시멘트벽 사이로 흘러나와
좁다란 골목을 메운다
햇살 잃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
가만가만 눈을 감고서
귀 기울여 마음의 눈을 열면
슬픔과 기쁨에 정겨움이 이어진다
촘촘히 수 놓인 오욕칠정이
훈훈한 내음으로 살아 숨 쉬는
행복한 가난이 그럴싸하다
빈촌 모퉁이 시끌시끌함을 감싸고
연꽃처럼 자비로이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