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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Mar 01. 2024

암, 그럴 줄 알았어.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작은 사무실에는 서류를 정리하고 컴퓨터에 뭔가를 바쁘게 입력하며 냉랭한 수술실 공기 때문에 식어가는 몸을 뜨거운 커피로 덥히는 직원들이 보였다. 내가 앉은 휠체어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겉에는 달콤한 설탕 파우더가 하얗게 덮이고 속에는 스트로베리 필링이 가득 찬 도넛이나 양상추가 가득 들어 있어 한 입 베어 물면 아사삭 소리가 나는 신선한 샌드위치가 커피 옆에 놓여 있을 것 같았다.

    

 요단강을 건너는 기분으로 수술실 문턱을 넘어서자 수술방에 배치될 초록색 옷을 입은 의사, 간호사들이 반질반질한 바닥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환자들을 휠체어에 태운 체격이 좋은 직원들까지 오가니 막 문을 연 수술실은 마치 세일 기간 첫날을 맞은 백화점처럼 활기가 넘쳤다. 그들은 어제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 오늘 아침에 아이가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투정 부린 일, 퇴근 후 시댁에 가야 하는 일들을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그런 풍경이 얼핏 초래할 수 있는 오해스러운 활기를 불식시키고 그 공간의 정체성을 완성시켜 주는 것은 핑크색 환자복을 입고 한쪽 벽에 찰싹 붙어 일렬로 도열한 열 명 남짓의 환자들이었다. 처음에는 다리가 멀쩡한 환자들까지 꼭 이렇게 휠체어에 앉혀 놔야 하나 싶었는데 수술을 앞둔 초긴장 상태의 환자라면 다리가 멀쩡해도 서 있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도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고개를 똑바로 가누고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줄줄이 서 있었다면 나처럼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환자는 머그 샷을 찍는 범죄자 같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4번 환자였다. 번호는 그날 아침에 부여되었고 나는 어느 시인이 말했듯 막대기에 나란히 꿰인 북어들 중 하나처럼 3번과 5번 환자 사이에 끼어 앉아 하필 4번이군, 하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생각은 다음 생각에 썰물처럼 멀리 밀려났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에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먼지가 뽀얀 화분처럼 오도카니 놓여 있자니 모자를 벗긴 민머리가 몹시 신경 쓰였던 것이다. 안경도 병실에 두고 오게 한 터라 모든 것이 희뿌옇게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안대로 눈을 가린 술래가 된 양 불안함과 초조함이 더해졌다.    

 

 내가 암 수술도 받기 전에 진작 민머리가 된 이유는 수술 후 항암 치료를 하는 보편적 순서를 깨고 수술 전에 항암 치료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은 암 덩어리가 너무 커서 곧바로 수술을 하면 유방을 모두 절제해야 하니 항암 치료를 먼저 하면서 암 덩어리가 작아지길 기다려 보자고 하셨다.     


"이렇게 암이 커질 때까지 어떻게 몰랐어요? 손으로 만져도 덩어리가 집히는데, 젊은 분이"

"수술과 항암 치료가 힘들긴 하지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젊으니까."  

"유방을 다 절제하기보다는 항암 치료하면서 크기를 줄이고 부분 절제할 수 있도록 한 번 해 봅시다. 아직 젊은 분이니까."

"설사 전 절제한다고 해도 너무 걱정 말아요. 성형 수술까지 같이 하면 됩니다. 젊은 분들은 대부분 그렇게 해요"     

 유방암 분야에서 상당히 정평이 나 있다는, 그러나 의사보다는 화가가 어울려 보이는 희끗희끗한 퍼머 머리의 의사 선생님은 말끝마다 '젊다'라는 것을 당신 치료법의 근거처럼 내세우시곤 했다. 그 말을 몇 살 먹은 환자들에게까지 덧붙이는지 그 마지노선이 궁금하곤 했다. 오십 살? 육십 살? 칠십 살? 유방암에 걸린 모든 여성 환자들에게 기분 좋게 던질 수 있는 위로의 멘트일 것 같기는 했다. '예쁘니까'같은 말은 환자가 누구냐에 따라 쓸까 말까 고민해야 하는 말이지만 '젊으니까'는 백세 시대 운운하는 요즘에는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유쾌한 말일 테니까.     


  수술을 미룬 또 다른 이유는 딸아이의 외고 입시가 6주 뒤였기 때문이었다. 대원외고. 그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딸은 생애 최고로 고단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거의 바닥까지 내려 온 셔터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슬라이딩하듯 전학 마감 시간에 겨우 맞춰 서울로 전학 온 딸은 열 여섯 인생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경기도에서 전학 온 학생의 각종 처리 문제를 두고 서울 선생님들은 귀찮아 하는 기색을 역력히 내비쳤고 새 학교 친구들의 우정은 이미 공고하여 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좀처럼 내주지 않았다. 집에서는 외동딸로,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으로 늘 주인공 역할만 맡았던 딸은 갑자기 엑스트라로 밀려난 배우처럼 소외감과 싸우는 중이었다. 또 대원외고 입학에 실패하면 온갖 격려와 덕담에 휩싸여 떠들썩하게 떠났던 그곳으로 초라하게 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도 싸우는 중이었다. 그 외고의 면접을 6주 앞두고 있던 차에 엄마이며 면접 대비 선생님인 내가 유방암 3기라는 옹골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참으로 절묘한 시점이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대원외고 도전 자체를 포기했을 것 같고 조금만 더 늦었다면 대원외고 입시에 실패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마 3기에 발견한 것도 기적적인 우연이었다. 내 등에는 태어날 때부터 있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오래되고 친숙한 사마귀 같은 작은 혹이 하나 있었다. 누구 눈에 보일 리도 없고 아프지도 않고 커지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는 그런 무익, 무해한 것이었는데 어느 날 밤 문득 거짓말처럼 그 혹이 몹시 거슬리고 떼고 싶다는 열망이 불같이 솟았다.  

   

 인터넷으로 '작은 혹'이라고 검색을 하니 지방종, 피지 낭종 이런 결과가 떴고 그 두 가지를 전문적으로 제거하는 강동구에 위치한 외과를 찾을 수 있었다. 한강만 건너면 있는 아주 작지도 않고 아주 크지도 않은 병원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블로그에 올린 사진과 설명을 보니 세상의 혹이란 혹은 죄다 거기 모여  있었다. 제주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심지어 외국에서 온 혹들! 사타구니나 엉덩이, 겨드랑이, 옆구리,  심지어 머리통에 난 주먹만 한 혹들! 그런 혹도 당일 깔끔하게 수술하고 봉합한 사진들이 즐비했고 혹 안에서 꺼내진 징그러운 붉은 덩어리들이 거즈 위에 놓인 채 새빨간 보석이 진열된 것처럼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내 혹은 애교에 가까워 보여 땅따먹기 할 때 병뚜껑을 두 손가락으로 튕기듯 슬쩍 건드려만 주면 똑 떼어내질 것 같았다.  이렇게 작은 혹도 혹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혹은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다음 날 아침 바로 병원으로 갔다. 코딱지만한 혹 제거도 수술은 수술인지라 먼저 초음파를 찍었다. 의사 선생님은 물론 간호사 분들도 너무 친절하셔서 혹 떼고 나면 이 병원에 다시 와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건강검진을 받기로 예약까지 했다.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굳게 약속했다.     


"가로로 2, 3 센티미터 절개해서 제거하면 되겠어요. 흉터가 완전히 없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유방이나 갑상선은 주기적으로 검사하세요?"

"........ 아니요."

"아니, 왜요? 건강보험공단에서 공짜로 해 주는 것도 있었을 텐데요. 확인해 봐 드려요? 지금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아니요. 생각해 보고 나중에 하든지 할게요."

"나중에 언제요? 그렇게 미루다가 영영 안 하게 돼요. 이왕 오신 김에 검사 한 번 받아 보세요."

내가 살려고 그랬었나 보다. 의사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거듭거듭 권하셨고 결국 거절을 잘 못하는 나는 유방 검사부터 받기로 했다. 진짜 혹 떼려다 혹 붙였네, 하면서.  

   

 검사를 받은 그날 이미 유방 엑스레이를 찍던 간호사 분이 내 손을 끌어 갖다 댄 곳에 돌멩이처럼 단단한 이물질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았고, 의사 선생님도 결과를 들으러 올 때는 보호자랑 꼭 같이 오라고 하셨던 걸로 보아 이미 결론은 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병원을 나설 때 이미 정신을 반쯤 잃었다. 그래도 한강 변을 걷는 소풍을 끝내고 파김치가 된 딸을 데리고 검사 받은 날 저녁에 대원외고 입시설명회에 참석했다. EBS 스타 강사 출신이라는 선생님이 나와서 학교 자랑을 하시는데 그 두 시간 내내 대원외고와 암이 서로 내 머릿속을 점령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대원외고 이겨라! 대원외고 이겨라! 아무리 응원해도 승부는 자꾸 암 쪽으로 기울었다.     


 3일 뒤 나온다던 결과는 하루빨리 나왔고 그 당연한 결과를 혼자 병원에 가서 들었다. 그럴 줄 알았던 탓인지 눈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전국에서 KTX 나 고속버스를 타고 몰려든 암 환자들로 병원은 물론 근처 숙박업소까지 북새통을 이루는 암 수술에 가장 정평이 난 빅 5 병원을 가까이에 두고도 딸의 입시 일정에 맞춰 수술과 항암 치료의 일정 조율이 가능한, 그리고 수술 후에도 자주 병원에 다녀야 하니 집을 오래 비워도 되지 않는 조금 덜 정평이 난 병원을 선택했다. 치료 순서도 항암 치료를 1회 한 후 딸의 외고 면접을 준비하고, 면접이 끝나면 나머지 5회의 항암 치료를 끝내고 터울을 잘 조율해서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수술을 해 치우는 계획을 세웠다. 암 치료를, 철 지난 옷 정리를 생각난 김에 하듯 틈틈이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암환자이기 전에 엄마였으니까.      


 3주 간격으로 이어지는 항암 치료가 치료 후 1, 2주는 힘들고 그 후부터 다음 항암 치료일까지는 살 만하다는 치밀한 날짜 계산하에 얼른 1차 항암 치료를 받고 몸을 회복시킨 후 딸의 면접 대비를 했다. 2차 항암은 외고 면접이 끝난 후 해야 했기 때문에 간격을 좀 길게 하기로 했다. 다른 환자들이 암과의 다음 방어전을 위해 고기를 먹으며 체력을 비축하는 그 기간을 나는 딸을 위해 쓸 계획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어이없어하시면서도 면접, 입학, 첫 중간고사 예정일을 달력에서 함께 짚어 가며 치료 간격을 조정하는 등 적극 협조해 주셨다.     


 나는 말은 안 했으나 의문이긴 했다. 항암 치료 6회와 수술의 순서, 간격은 수열처럼 다양한 패턴으로 조합되어도 되는 것인지, 어떤 조합으로 치료를 받아도 치료의 효과는 동일한지. 대원외고 면접 후 2차 항암 치료를 받고 퇴원하던 날, 딸의 대원외고 합격 발표가 났고 암 발표에도 울지 않았던 내가 울었다.  


 그로부터 고작 나흘이 지난 화요일 오전에는 중학교 졸업식이, 오후에는 대원외고 합격생 예비 소집이 있었다. 2차 항암 치료를 하고 나흘밖에 지나지 않은 날이었는데 졸업식에서 코트를 입고 구두를 신은 채 족히 두 시간은 넘게 서 있었다. 연달아 대원외고로 이동해 강당에 앉아 딸에게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내 몸속에서 아우성치는 시커먼 고통도 장밋빛으로 물들이려 해 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면 입학도 하기 전에 딸이 유명인사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시시각각 고통에 베이는 몸을 가누었다.      

 그날이었다. 백 만 톤의 짐을 싣고 오래오래 아슬아슬하게 항해하던 배가 침몰하기 시작한 날이.  중학교 졸업식, 대원외고 합격생 예비 소집을 마친 후 항암 치료를 받은 지 나흘밖에 지나지 않은 내가 미식미식한 속을 부여 안고 출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러니까 암에 걸린 거야. 암, 그럴 줄 알았어.  


  4차의 항암 치료가 끝날 때까지 내 암덩어리는 도무지 약물에 반응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암 덩어리를 줄이는 것은 깨끗이 포기하고 한쪽 가슴을 전 절제한 후 남은 두 번의 항암 치료를 하자고 하셨다. 계획의 변경이었다. 2월 중순쯤 수술하면 입학식에 갈 수 있을까, 재빨리 주판알을 튕겨봤지만 계산이 나오든 안 나오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환자들은 대부분 아침 수술을 선호한다고 한다. 수술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야 뭔가를 먹을 수 있는데 오후 수술을 받게 되면 하루 종일 공복에 시달리기 때문이란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수술을 앞두고도 오후의 공복을 근심하다니, 이런 생각이 들 법 하지만 아무리 아파도 일상은 이어진다. 나는 원래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살았던 터라 하루쯤 음식을 못 먹는 것은 개의치 않았는데 그 간의 온갖 검사 경험을 통해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상당히 성가시고 초조한 일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침 8시 1차 수술 시간을 할당받았을 때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수술실 복도에 민머리를 내놓고 한참 앉아 있는 순서가 있을지는 생각도 못 했다. 3, 5번 환자는 확실한 각도로 고개를 돌려 돌아보진 않았지만 남자 환자였다. 3번은 나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고 5번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순식간에 둘러본 바로는 머리통이 매끈한 환자는 나뿐이어서 왠지 기가 죽었다.  

   

 소소한 검사 때도 몇 번이고 환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게 철저했고 심지어 담당 의사 선생님 이름을 물을 때도 있었다. 환자의 차트가 바뀌는 것 같은 실수로 엉뚱한 환자의 엉뚱한 부위를 잘라 내면 큰일 날 테니, 하물며 수술실에서는 당연히 확인, 또 확인이 필요하리라. 열 명도 넘는 수술받을 환자가 일렬로 도열하자 1번부터 줄줄이 군대에서 관등성명 대듯 자신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병명, 수술 부위를 대고 이름표 같은 것을 가슴에 달았다. 1번 환자는 담석 제거 수술이니 그나마 다행이네, 2번 환자는 용종 제거니 부럽네, 3번 환자는 무릎 수술이니.....  세계 선수권 수영 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선수들의 국적, 최고 기록 등을 소개하는 중계 방송 장면과 흡사했다. 금메달 후보는 누구일까?   

  

 이름 말씀해 주세요.  김진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는요? 7*****, 어떤 수술 하세요? 유방요. 어느 쪽 수술하세요? 왼쪽요. 무슨 면접시험이라도 보듯,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수술을 받지 못할 것처럼 줄줄 읊고 보니 4번까지의 환자 중에서는 나 혼자 암일 것 같았다. 강력한 금메달 후보인가. 이름 말씀해 주세요. ***.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는요? 8*****. 어떤 수술 하세요? 췌장요. 5번 환자는 아무래도 30대 췌장암 환자가 아닐까? 췌장 뒤에 붙는 병명으로는 암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풍문으로 주워 들은 내 상식으로는 대장암이나 췌장암 같은 암들이 가장 악질적이고 사망률도 높다던데. 열 명의 자기소개가 끝났을 때 내 마음의 금메달은 5번 환자였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마음속 금메달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날 아침 수술실 복도에서 금메달을 놓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다툰 것은 역시 암환자들이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간호사들이 시간의 간격을 두고 한 명씩 오더니 전당포에 맡겨 둔 물건을 찾아가듯 환자들을 수술방으로 데려갔다. 이때 다시 관등성명 확인이 있었다. 나를 뺀 모든 환자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모조리 다시 읊은 뒤 마침내 지루한 도열의 시간을 끝내고 간호사들의 손에 이끌려 자신들의 수술방으로 떠났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내 수술방 담당 간호사가 드디어 지각한 학생처럼 뛰듯이 걸어와 나의 관등성명을 확인했다. 놀이공원에서 잃어버렸던 엄마의 손을 다시 잡은 아이 같은 마음으로 들어줄 관객이 없는 외로운 자기 소개를 한 후 나는 꼴찌로 수술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결국 4차까지 항암 치료를 하고 한쪽 가슴을 전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남은 5, 6차 항암 치료를 하면서도 줄곧 출근을 하고 일을 했다. 백만 톤의 짐을 싣고 오래오래 항해하던 오십 킬로그램도 나가지 않는 작은 배는 침몰을 시작하고도 일 년을 더 버텼다. 암에 걸리고도 매일 가는 단골 편의점 사장님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런 후에 이제는 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비로소 기특한 생각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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