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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Mar 04. 2024

강릉사람이드래요.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감자를 강판에 갈아서 가라앉은 녹말을 섞어 노릇노릇하게 지진 감자전이 먹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 내게 붙어 있다가 손가락 사이로 우수수 뽑혀 나가는 머리카락처럼 멀어진 친구들도 보고 싶었다. 살 확률이 죽을 확률보다 훨씬 높다지만, 그래도 불안감은 좀처럼 빠지지 않는 중년의 뱃살 마냥 지긋지긋하게 들러붙었다. 동시에 그리운 것들이 겨울 바다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한꺼번에 펑펑 쏟아져 내렸다.     


 무엇보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강릉'하면 처음부터 주연배우였던 경포대나, 모래시계라는 드라마 하나로 일약 전국구 스타가 된 정동진 바다, 정작 강릉 토박이들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예술적 커피 거리가 있는 안목 바다를 떠올리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바다는 송정 바다였다.  내가 열아홉 해 동안 보고 자란 송정 바다는 경포대와 안목의 딱 중간 정도에 있다. 경포대에서 출발해서 양 옆의 울창한 소나무가 호위하고 있는 좁은 2차선 도로를 5분도 채 달리지 않아 송정 바다가 나온다. 경포대와 안목이라는 걸출하게 출세한 형제들과 달리 삼 형제 중 둘째처럼 딱히 관심을 끌지 못하는 송정 바다.  


 대부분의 강릉 사람들이 경포에 놀러 가지 않듯 스무 살에 강릉을 떠날 때까지 바다는 한 번도 내 생각의 중심에 있어 본 적이 없다. 책을 펴면 글자를 볼 뿐 여백을 보지는 않듯이 강릉 토박이인 내게 바다는 그냥 존재감 없는 배경일뿐이었으며 책의 흰 여백 같은 것이었다. 또 강릉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어릴 적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섬찟한 기억들을 한 두 개는 갖고 있기 마련이고 친구네나 친척들 중 고기를 잡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라 바다는 삶의 현장이지 낭만의 공간은 아니기 쉬웠다.     


 또 서울에 온 이후 두껍게 바른 파운데이션 같은 촌스러움이 오랫동안 내게 붙어 있었는데 바다도 그 촌스러움의 일부였다. 수영장과 비교하면 그랬다. 이화여대에 입학하고 나서 '수영'이란 과목이 교양필수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바다와 더불어 자랐으면서도 수영을 못했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내가 친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건 '수영장에서는 꼭 수영복 입어야 하나?'라고 물어서였다. 나는 그때까지 수영장이라는 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다. 집 마당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공짜로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바다가 떡하니 있는데 아버지 혼자 벌어 4형제를 포함해 외할머니까지 8명이 먹고사는 집에서 셋째를 수영장에 보내 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또 우리 동네에서는 어릴 때 두툼한 흰 난닝구에 흰 빤스 차림, 조금 커서는 그 위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수영을 하곤 했다. 그래선지 서울 사람들의 몸에 찰싹 달라붙는 수영복은 아주 흉측해 보였다. 서울로 막 상경해, 걸핏하면 북한 사투리 한번 말해 보라고 놀리는 서울 친구들 속에서 순간순간 주눅이 들고 쭈뼛쭈뼛했던 대학 신입생으로서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해야 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게다가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니, 입학을 후회할 지경이었다.      

 

 그랬던 바다가, 한 학급에 꼭 한 명씩 있는 존재감 없는 친구 같던 바다가 이상하게도 딸을 낳기 직전이나 암 수술을 받기 직전처럼 삶이 태클을 걸 때마다 보고 싶어졌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애인처럼 나는 바다를 잊고 살았지만 바다는 첫사랑의 추억처럼 아직 나의 깊숙한 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삶에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피가 철철 흐를 때마다 느꼈다.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내가 놀란 게 몇 가지 있다. 우선 언제 어디를 가나 강릉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단오제 때만큼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신도림 역에서 내렸던 적이 있는데 정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사람들에게 휩쓸려 갈 때는 어릴 적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데굴데굴 빨려 들어갈 때처럼 두려움을 느꼈다. 또 매일 내리는 이대 역도 대부분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특히 아침이면 하늘에 닿을 듯이 솟은 에스컬레이터에 초등학교 시절 전교생이 걸어서 강문 숲으로 소풍 갈 때처럼 하염없는 줄이 늘어서 있곤 했다. 논술 첨삭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원은 방배 역에 있었는데 가는 길에 있는 사당 역도 서가에 빽빽이 꽂힌 책보다도 사람의 밀도가 높아 보였다. 지하철에서 내리려면 두 손에 힘을 꽉 주고 요리조리 비틀어 책 한 권을 빼듯 요령껏 움직여야 할 때가 많았다. 수영장에서는 수영복을 입어야 하냐고 물어서 친구들을 웃겼던 내게 친구들이 또 말했다. 네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뭔데? 너 매일 '오늘이 무슨 날이야?'라고 물어. 아... 강릉에서는 무슨 날이어야만 사람이 많았는데 서울에서는 무슨 날이 아니어도 늘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심지어 그 많은 서울사람들은 뛰다시피 빨리 걷기까지 했다.  지하철 환승 통로에서는 사람들이 장롱 밑의 회색 덩어리로 엉겨 붙은 먼지처럼 뭉쳐서 이동하기 마련 아닌가. 나는 그 사람의 흐름에서 걸핏하면 뒤처지고 뒷사람이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휘청거리곤 했다.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맞았던 겨울 어느 날 뉴스도 신기한 사건이었다. 그날 아침 뉴스에서 서울에 폭설이 내릴 거라고 예보하며 앵커 아저씨가 정말 간곡한 표정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날 눈은 좀 내리다 말았다. 에이 뭐야... 폭설이라더니... 그런데 그날 저녁 뉴스에서 앵커 아저씨는 다시 간곡한 표정으로 지금 폭설로 서울 시내 도로 상황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 아.... 서울에서는 눈이 7cm 정도 내려도 폭설이라고 하는구나.  강릉에서는 한 번 눈이 오면 '기본'이 무르팍이다. 그리고 좀 왔다 하면 1m. 심지어 내가 중학생일 때는 눈이 1m 60cm 정도 내린 적도 있다. 그때는 동네 어른들이 모두 지붕 위에 올라가 눈을 쳤는데 안목에 있던 돔형의 롤러 스케이트장이 무너지고 시내 가장 번화가에 있던 신영극장이 무너졌다. 눈이 1m 넘게 쌓이면 물탱크를 올려놓은 것과 같아서 비스킷이 바삭 부서지듯 지붕도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서울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까. 웬만한 눈에는 눈도 깜짝 안 할 만큼 이골이 난 강릉 사람들도 그 해 폭설에는 혀를 내둘렀다. 우리 집은 바로 바다 옆 소나무 숲이 울창한 마을에 있었는데 나뭇가지가 눈에 뚝뚝 부러지는 소리가 얼마나 밤새도록 들리는지 누가 내 팔다리를 자근자근 부러뜨리는 것 같았다. 일단 눈이 내리는 것이 그치자 모두들 눈 속에 파묻힌 자신의 '물건'을 찾아야 했다. 아빠들은 자동차, 엄마들은 장독 항아리, 아이들은 자전거. 그런 것들이 모두 순식간에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혀 버렸는데 어른들은 다들 긴 장대를 갖고 자동차를 세워 놨다고 짐작되는 곳이나 항아리가 있음 직한 곳 근처에서 눈 속을 장대로 슬쩍 찔러보고 다녔다. 그리고 장대가 무언가에 턱 부딪히면 손으로 살살 눈을 헤쳤다. 그 정도 내려야 폭설인 곳이 강릉이었다. 내 기억으로 7cm 정도 내리는 눈은 뉴스거리도 아니던 곳이었다.  

     

 바다와 눈이 너무 흔한 곳에서 자란 탓일까. 상당히 감성이 메마른 사람일지라도 약간의 애틋함을 갖게 되는 그 두 가지에 대해 지극히 무덤덤해진 사람이 바로 나였다. 서울에 가서 대학을 다니며 보았던 친구들처럼 살고 싶었고 딸을 그 친구들처럼 키우고 싶어서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던 내게 바다나 눈 따위는 냉동실에 얼려 놓은 수북한 떡처럼 관심이 잘 가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암 수술을 받고 나서 조각조각 흩어졌던 몸과 마음의 퍼즐 조각을 제 위치로 되돌리는 시간이 슬며시 찾아왔다. 아주 얕은 선으로 홈이 파져 있는 커다란 퍼즐 판이지만 맞는 조각을 넣으면 딱 여기라는 감이 신기할 만큼 바로 왔다. 그 시간 동안 가만히 들여다본 내 마음속에는 바다와 눈이 개락인 도시 강릉과 찐 감자를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던 그곳의 소박한 사람들이 아직 간직되어 있었다.      

 

*개락이다 : ‘매우 많다’는 뜻의 강릉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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