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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Apr 21. 2024

강제로 모여 삽니다

 연세대학교 신입생이 되면 강제로 모여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은 일 년이지만 이 년, 혹은 그 이상 송도 국제캠퍼스 기숙사에서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합니다. 집이 인천이거나 결핵같은 전염성 질병이 있어야 예외가 인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 밖의 어떤 사유가 더 인정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연세대학교에 다니게 될 줄 알았더라면 고려대학교를 지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엄청난 일입니다. 기숙사 생활이 좋고 나쁨을 떠나 대학이라는 자유로운 곳에서 성년인 학생들에게 삶의 양식을 강제한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기숙사 생활이 싫다는 이유로, 갈 수 있는 연세대학교에 가지 않을 학생은 많지 않을 거고 제 딸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저의 딸은 기숙사 생활이 너무너무 싫어서 중학교 3학년 말에 서울로 전학을 했고 졸업할 때까지 두 달 여를 눈물콧물 쏙 빼며 살았습니다. 외고는 가고 싶은데 경기도의 외고에 진학하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거든요. 그러느니 서울로 전학을 해서 서울의 외고에 진학하겠다는 결심을 했었지요. 졸업을 앞두고 전학을 한다는 것은 아이에게나 부모에게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기숙사에 대한 거부감이 그만큼 컸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피해 간 기숙사 생활을 대학생이 되어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2월 말 신촌캠퍼스에서 입학식을 하고 삼일절 오후에 송도 국제캠퍼스로 떠났습니다. 침구세트, 애착인형, 드라이기, 바디워시 및 바디로션과 샤워타월, 화장품 일체, 드라이기와 고데기, 슬리퍼, 미니 청소기와 휴지통, 가습기, 수건 열몇 장, 속옷과 겉옷 여러 벌, 잠옷, 두루마리 화장지 및 양치 세트와 샴푸린스, 미니 생수 한 묶음.... 한 살림 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도사도 살 것이 자꾸만 생기더군요. 입소할 때 가져간 최초의 짐만으로도 트렁크를 가득 채우고 뒷좌석에도 남은 짐을 실었습니다.


 기숙사에 도착해 보니 신분증을 맡기면 수레를 대여해 주더군요. 부모님은 1층 로비까지만, 배정받은 방으로는 학생들만 올라갈 수 있습니다. 피난민처럼 짐을 몽땅 실은, 누가 봐도 신입생인 앳된 아이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올망졸망 서 있었습니다. 로비 구석에는 로켓을 타고 날아왔던 엄청난 택배의 잔해가 수북했습니다. 경상도, 전라도는 물론 제주도에서 발사된 로켓도 있더군요. 짐을 미리 택배로 부쳐도 되는 거였나 봅니다.  


 저는 딸이 짐을 정리하고 내려오면 송도 시내에 가서 밥을 먹고 헤어질 계획이었기 때문에 한참을 로비에서 기다렸습니다. 덕분에 많은 가족들의 이별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들은 대부분 손만 한 번 휙 들어 보이고 쿨하게 사라졌습니다. 그에 비해 딸들은 엄마아빠와 포옹하고 여러 번 뒤돌아보고 애절하게 손을 흔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아들딸 구별 없이 부모님 품에 남겨진 애완견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모습이 흔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평범한 신분의 개들만 보았었고 지금도 애완견을 키우지 않는 저에게는 낯선 풍경이었지만 신입생들이 애완견과 눈을 맞추며 자신을 언니, 오빠, 형, 누나 그렇게들 부르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습니다.


  연세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는 송도가 송베리아로 불린다고 합니다. 겨울이면 시베리아처럼 춥고 바람이 많이 분다는 원망을 담은 별명이지요. 집 떠나 왔다는 기분 탓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전해 주는 조언 중에 '대용량 수분 크림'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안 그러면 얼굴이 쩍쩍 갈라진다네요.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송도는 좀 썰렁해 보였습니다.


 아주아주 한참 기다린 끝에 짐을 정리한 딸이 로비로 내려와서 하는 말,

"엄마, 룸메이트가 중국 아이야. 한국말을 잘 못 해."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딸의 룸메이트가 중국 학생이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제 딸의 표정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아서였습니다. 저는 라떼지만 딸은 확실히 MZ 세대라서 그런 걸까요.

"그럼 어떻게 말해?"

"영어로 하지!"  

아, 세상에는 한글 말고도 많은 언어가 있다는 것을 한글밖에 모르는 저는 자꾸 잊어버립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세 번째 룸메이트는 재수를 한 저의 딸보다 네 살 많은 언니 학생이랍니다. 학생들 세계에서 서열상 연세대학교보다 딱 한 단계 아래인 학교를 다니다가 옮겨 왔다고 합니다. 나이상으로 오수생인 셈인데 제가 신입생일 때 사수생 언니를 본 적이 있을 뿐 현실에서 오수생을 보기로는 처음입니다. 유명 교육 유튜버 중 오수생 출신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 말려에 등장하는 오수 형만큼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거든요. 아무튼 지금 딸의 룸메이트는 한국말을 알아는 듣지만 잘하지는 못하는 중국 친구와 서울에다가 몇 년 산 자취방을 남겨 두고 온 이천 년생 언니입니다.  


 기숙사 생활이 싫은 것은 비단 저의 딸만이 아닌가 봅니다. 저의 딸은 조금 더 비싼 2인실에 당첨됐다고 좋아하다가 전원 3인실로 변경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실망했었습니다. 3인실은 한 학기 비용이 70만 원 남짓입니다. 밥은 주지 않지만 그래도 비싼 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에게는 엄청나게 비싼 신촌의 방값을 생각하면 강제 기숙사 입소가 좋은 제도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서울과 송도 근교에서 온 학생들은 아무래도 지척에 집이 있다 보니 틈만 나면 송도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입학식 때 들어 보니 기숙사 제도의 취지에 공동체 의식 함양 등 MZ 세대에게 비밀 병기가 될 수 있는 좋은 점들이 많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니까요. 기숙사비를 다 내어 놓고 집에서 통학하는 학생들도 가끔 있고 수요일까지 미친 듯이 수업을 몰아서 듣고 수요일 오후면 집으로 쌩하고 가버리는 학생들은 그보다 많다고 합니다.  딸의 룸메이트 언니도 일주일에 이틀만 기숙사에서 잔다고 하고 저의 아이도 목요일 오후면 벌써 서울에 있는 자기 방 침대 위에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학생이라면 기숙사 입소가 강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학교를 지원할 때와는 달리 고려대학교라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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