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품은 성곽의 이야기
해미읍성, 시간의 벽을 넘다
해미읍성의 돌담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시간은 마치 멈춘 듯 고요해진다.
내 발아래 깔린 거친 돌길과 이끼 낀 성벽은 60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이곳은 단순한 옛 성이 아니다.
해미읍성은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 거대한 도서관이자, 수많은 이들의 삶과 희로애락이 켜켜이 쌓인 기억의 무덤이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바람결에 실려오는 풀냄새와 흙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나를 과거로 이끈다.
성곽을 둘러싼 초록빛 잔디밭은 마치 푸른 카펫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를 걷는 이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를 여행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은 이곳의 고요한 분위기에 생기를 더한다.
하지만
그 생기 속에서도 성벽의 돌 하나하나는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축성된 이래, 왜구의 침입을 막고 백성들을 지키던 요새였다.
또한,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군사 훈련을 지휘하며 나라를 지킬 전략을 구상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성벽에 기대어 눈을 감으면, 과거의 풍경이 생생히 떠오른다.
땀을 흘리며 무거운 돌을 나르던 백성들의
고된 손길, 왜구를 막기 위해 활을 겨누던
병사들의 굳건한 눈빛,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깊은 고뇌 속에서 나라의 운명을 고민하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이곳은 단순히 방어의 요새가 아니었다.
해미읍성은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자, 때로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특히 조선 말 천주교 박해 시기,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고난을 겪으며 믿음을 지켰던 이야기는 성벽에 깊은 상처처럼 새겨져 있다.
해미읍성을 걷는 것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 땅에 살았던 이들의 숨결을 느끼는 여정이다.
성문 위에 올라 바라보는 드넓은 들판과 저 멀리 펼쳐진 하늘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의 특별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곳에서 나는 비단 이순신 장군이나 병사들뿐 아니라, 이름 없는 백성들의 삶까지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희망과 고통,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진 생의 의지가 이 성벽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금, 내 발아래 살아 숨 쉬는 이 모든 시간의 흔적들은 해미읍성을 단순한 유적지 이상으로 만든다.
이곳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다리다. 성벽을 스치는 바람은 여전히 그 옛날의 이야기를 속삭이고, 나는 그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되새긴다.
해미읍성은 그렇게, 시간의 벽을 넘어 나와 역사를 하나로 묶어주는 마법 같은 장소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