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난잡기(1)

같은 사람, 다른 언어 그리고 그 사이의 나

by Kayden

아침부터 여지없이 영국 아침의 안개는 짙게 내렸다. 한국에서는 안개가 낀다고 하면 '아, 앞에 살짝 뭐가 흐리게 보이겠구나.' 하는 수준이겠으나, 여기는 그 클라스가 다르다. 안개가 끼면 세상이 변한다. 전방 50미터만 보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 나올 법한 운무가 세상 전부에 드리워서 새삼스레 세상에 만약 종말이 온다면 이런건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그 멋이 나쁘진 않다. 하이얀 운무가 주변에 가지런히 내리지만 그 분위기가 가볍지 않고 묵직하다. 그것과 어울린 자연들 또한 제 멋을 잃진 않고, 다만 그 안에 어우러져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렇게 멋진(?) 운무를 가르며 난 오늘도 청강을 위해 집을 나선다. 집은 강의장에서 그리 멀지 않다. 운이 좋게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다보니 강의 시간 전 농땡이를 최대한 길게 필 수 있는 축복을 얻었다. 강의장을 가는 길은 일반 한국 대학 풍경과 다르지 않다. 각 전공별 칼리지가 제 위치에 딱 자리잡아 있고, 가는 길에는 버스가 지나다닐 수 있는 주도로가 가지런히 지나가고 있다.


강의장에 도착하니 영국 토종 런더너(Londoner) 반장 친구와 기숙사를 들어오지 못해 하숙을 하는 두 친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시 도전이 시작된다. 이 순간 나는 한국사람이 아니다. 언어를 조립하는 매커니즘을 저기 저 친구들처럼 바꾸고.. 가슴을 펴고.. 단어를 던진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종족임을 느끼게 한다. 물질로서 존재하지 않는 이 언어라는 것이 나와 그 친구들의 정체성을 구분해준다. 아주 클리얼리(?) 하게.


그래도 도전은 계속된다.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 파파고를 검색해 대화를 시도하고, 못 알아 들었어도 알아 들은 척 교만을 떤다. 갑자기 옆 친구가 껄껄대면 나는 깔깔로 대응한다. 질 수 없는 매운 고추장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도전한다. 그래도 친구들이 인성이 바른 편이다. 내가 병아리처럼 끊임없는 영어적 막말(?)을 던져대도 다 알아들어주며 대화를 받아준다.


여기와서 신기한 건 영어의 향상이 눈에 띄게 느리다는 것. 오만 잡가지 유튜버들의 영어 향상기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어느새 영국의 신사적 악센트를 구사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지만, 현실은 그저 유치원 생같은 영문 구사와 그들에게는 그저 어색한 문장들 뿐이다. 이러다가 있는 영어 지식마저 망가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까지 생길 마당이다.


수업은 더욱 가관이다. 들어오는 교수님은 스페인 출신의 박사님이다. 겉모습은 캐주얼하고 프리한 스타일이라 박사라는 타이틀이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더 매력적(?)이다. 그는 이어서 그만의 스타일이 묻어있는 영어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스페인틱한 영어라, 나는 이런걸 어디에서 들어본 적도 심지어 수능공부하던 시절 듣기평가 연습으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더 웃긴 건 저 느낌으로 영어를 아주 잘 구사하는 교수님과 그걸 정말 잘 알아듣는 학생들이다. 박탈감이 몰려온다. 나도 세종대왕님이 만드신 한글에 자부심이 상당한데, 이 상황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냥 수업을 듣다가 속으로 위대한 한글을 통해 욕 한 바가지 던져본다.


그렇게 하루 수업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정체성을 구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나의 정체성을 상쇄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향한 도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생태계에서는 진화할 수 없다. 그들과 대화해야, 하물며 안된다면 그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살아 남을 수 있다.


홧김에 그동안 아껴왔던 햇반 하나와 포기김치를 꺼냈다. 널 그동안 아껴왔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이 세상이 날 분노하게 만들었다. 조상님들이 만드신 한국인용 포션을 마셔야만 나의 에너지가 회복될 거 같다. 역시 이 맛이다. 이 소금과 액젓의 콜라보레이션. 이게 한국인이다. 다 먹고 나니 배가 따뜻하다.


한국인으로 다른 정체성을 학습하는 건 쉽지 않지만, 도전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학습한다하여 나의 아이덴티티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김치랑 밥을 먹으면 기분이 좋은 건 그 증거다. 내 안의 더운 피가 김치를 받아들이고 더 뜨거워 지는 거, 그게 나의 아이덴티티다.


오늘도 큰 도전이었다. 내일도 더 잘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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