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미리 상고머리의 결심,

나라는 계획 중독자,

by Kayden

다시 한번 새롭게 살아 보이리라 다짐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자부했다. 아름다운 웨일스에서 돌아온 그 날밤, 나는 계획을 세웠다. 늦었지만 지금 흘러가는 이 2021년의 옷자락을 잡아보겠노라고. 그리고 나는 달라졌다고. 그렇게 큰 믿음을 가졌다. 집에 와 짐을 풀었다. 10일간의 긴 여행이었다. 짐 또한 많았다. 이삿집 마냥 거진 텅 비어있던 집 안은 집주인이 가지고 온 여로의 흔적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와이프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말했다. 영국에 와서는 이발소를 이용하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던 와이프는 잠시 경력을 중단하고 나와 함께 이국의 땅으로 왔다. 내 머리를 10파운드의 '바리깡'으로 만지는 것은 그녀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지난 시간 동안 머리가 덥수룩하게 자랐다. 짧아 보이지만 그 속에도 내가 보낸 흔적이 녹아있는 마냥 덥수룩했다. 12미리로 돌려달라 부탁했다.


와이프는 그래도 되겠냐고 재차 물었다. 난 상관없다고 말했다. 사실 원래 항상 짧은 머리였지만, 이 참에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각오를 다질 겸 하여 강인한 인상을 먼저 고른 셈이다.(?) 와이프는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 바리깡에 탭을 끼웠다. 모터도는 소리가 힘차게 귀를 울렸다. 그리고 눈 앞에는 검정 머리카락의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고, 거울에 섰다. 웬 무술인 하나가 서있다. 뭐랄까. 최소 서양인이 말을 걸어도 긴장하며 말을 걸 것 같은 그런 분위기. 맘에 들었다. 고맙다고 말했다. 샤워를 하며 남은 머리카락도 하수구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책상에 앉은 후 노트북을 켰다. 스티커 메모 앱을 가동한 후 지금부터 하고 싶은 것들과 루틴을 적어내려 갔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지내지 않을 거야.', '이건 너무 소중한 시간들이야.' 수많은 자기 계발서로부터 종합한 나의 각종 관리 지식들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른 기상, 지옥의 PT, 무한 공부 그리고 독서 등 나의 계획은 픽션에 가까운 논픽션.


계획을 완성했다. 보고 있으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보고만 있어도 앞으로 있을 나의 미래에 가슴이 맥동 치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다. 흥분된다. 그렇게 침대에 누웠다. 자 이제 일찍 잠들고 내일 일찍 일어나는 거야. 그리고 힘차게 다시 시작해보는 거다. 좋다. 맘 속에 시계가 돌기 시작한다. 이 세계는 인터스텔라 속 블랙홀인가. 마음속 시계는 2시간이 지나도 현실의 시계는 2분이 지날락 말락. 잠이 안 온다. 시간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른 시간이긴 하다. 그렇게 얼떨결에 유튜브를 켰다. 유튜브를 키니 알고리즘은 네가 뭘 원했는지 알고 있었다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며 나를 유혹한다. 나란 사람은 그렇게 다시 탐닉했다. 아차 하며 전원을 끄니 어느덧 새벽 2시.


그렇지, 나라는 계획 중독자. 시작과 동시에 삐끗한 나의 계획. 그래도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지키고 말 거다. 어느 영화에서 주인공이 말했다. 내일을 사는 삐리리는 오늘을 사는 삐리리에게 죽는다. 이놈의 계획 중독자. 그렇게 또 내일을 기다리며 오늘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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