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기적 Aug 17. 2024

우연일까 운명일까

겹쳐지는 우연들

언니와 함께 인생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나이는 20대 중후반이 되었지만 둘 다 해외여행 경험은 물론 여권마저 없었다.


해외여행이 처음이었기에 자유여행보다는 패키지여행을 알아봤다. 일하면서 급하게 알아보느라 잔여 자리가 남은 곳을 전전하며 알아보던 중 이탈리아와 스위스 패키지여행이 눈에 들어왔다. 6박 9일. 일정도 딱 알맞았다.

해외여행 경험이 전무했던 우리에게는 그저 적당한 가격과 가고 싶은 곳, 날짜만 맞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국 비행사에 경유 1회, 9일 일정 중 3일은 비행에 허비하고 패키지 스케줄은 빡빡하고... 열악한 조건이었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정해진 이탈리아, 스위스행 6박 9일 패키지여행.

직장인인 우리에게 패키지여행은 탁월한 선택이기도 했다. 여행 전까지 불철주야 일만 하다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죽하면 여권 만들 시간도 없어 여행사에서 전화가 올 때쯤에서 일주일 전 급하게 여권을 만들어 여행사에 여권을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에 잔뜩 들떠 처음으로 속눈썹펌도 하고 여행 당일 미용실에 들러 염색도 했다. 여행 하루 전날에는 여행 일자별 어떤 옷을 입을지 패션쇼를 하며 코디를 정하기도 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설지만 설렘이 가득한 채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패키지여행으로 모인 대부분은 50~60대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들이 많았다. 그리고 한 젊은 남성이 혼자 있었다. 대부분 중년의 나이대가 많다 보니 20대의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까지 가기 위해 이스탄불에서 1회 경유를 해야 했다.

이스탄불 경유지에서 모여 가이드님은 조를 나눠주었다. 30여 명쯤 되는 관광객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조 단위로 나누어 서로 챙겨주는 게 수월하기 때문이다. 모녀/자매/신혼부부 조가 생겨났다. 우리는 자매 조였다. 혼자 온 남성은 우리 조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했다.

식사를 하고 바티칸 박물관에 갔다. 뜨거운 햇볕 아래 바티칸 박물관에 입장하기 위해 긴 시간 웨이팅을 해야 했다. 혼자 온 남성은 우리 자매 뒤에 있었다. 의식은 되었지만 낯가림에 쉽게 말을 걸진 못했다. 이번 여행 또한 누구와 친목을 목적에 둔 게 아니라 관광과 힐링이 주된 목적이었기에 낯선 사람들과 굳이 친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패키지여행은 단점이라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발 도장만 찍고 휘리릭 구경하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티칸 박물관에 2시간 웨이팅 후 들어갔으나 정작 구경은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빠르게 훑고 지나가야 했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나와 다음 여정을 위해 패키지원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데 혼자 온 남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낯가림이 심한 나는 별 의도 없는 질문에도 얼어붙어 있었다. 어색함에 나이를 선뜻 말하니 적잖이 당황해 보였다. 동안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크게 불린 나이에 믿기지 않을 것이 예상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어려 보인다는 말과 함께 스무 살이나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반대로 나이를 묻자 상대는 서른 살이라고 했다.

상대방의 나이가 나에게는 더 충격이었다. 20대 후반이나 될 줄 알았는데 앞자리가 나와 다르니 조금은 멀어 보였다.


우리의 첫 대화였다.


이후 패키지여행을 다니며 같은 조여서 우리는 자주 마주쳤다. 조식을 먹을 때나, 관광지에 갈 때나 특히 언니와 사진을 서로 찍어주고 있을 때면 따라붙어서 자기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혼자 와서 찍어줄 사람이 없으니 흔쾌히 찍어주기는 하였으나 어색함이 풀어지지 않아 불편하기는 했다.


패키지여행에서 내 또래의 사람들은 다섯 명가량 돼보였다. 여행의 중반쯤 모녀여행으로 온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분께서 밤에 또래들끼리 모여서 맥주 한잔 하자고 청했다. 거절하기도 그래서 그러자고 했지만 그날 밤 언니는 피곤하다고 가지 않았고 약속을 했던 나는 약속을 해놓고 안 가기도 께름칙해 혼자서 숙소 밖으로 나갔다. 연락처도 모르는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나 싶어 혼자서 숙소 밖을 배회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괜히 나왔다는 생각에 다시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데 혼자 온 남성을 마주치게 되었다. 신기했다.

맥주를 마시러 나왔냐는 말에 그렇다고 했다. 또래 여성 두 분이 맥주를 사서 오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숙소 앞 테이블과 의자에 앉았다.

어색함에 정적이 흘렀다.

뒤이어 두 명의 또래 여성이 하이네켄 4캔을 사들고 왔다. 각자 가져온 김, 과자를 안주 삼아 먹으며 여행 이야기를 나누며 아쉬운 밤을 지새웠다.



9일간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여행의 막바지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언니가 코로나에 걸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층 예민해져 나에게 신경질까지 내고 싸우고 말았다. 이때 혼자온 남성과 다니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같이 시간을 보냈다. 인연은 귀국하는 면세점에서까지 이어졌다. 함께 면세점 구경을 하다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마주했다. 카트를 빌려 쇼핑을 하려는데 앞에 있는 카트를 빼갔는데 직원이 굳이 두 번째 카트를 가져가라고 한 것이다. 이 모습을 함께 마주한 다른 손님이 "What's different?"라고 하는 게 정말 웃겼다. 경유지에서는 비행기 시간이 지연되어 면세점에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아프다고 혼자 있는 언니를 뒤로하고 나는 계속 그 남성과 함께 면세점 쇼핑을 했다.

둘만 있었던 시간들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행 내내 뒤를 따라다니는 이 남성이 내심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라면 둘이 있는 시간 동안 내게 연락처를 물어봤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수화물을 찾을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각자의 수화물을 찾고 각자의 삶으로 흩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