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올레
2023. 7. 24 (월)
아침 일찍 너무 상쾌하게 일어났다. 좀 오래된 펜션이지만 사장님이 끝내주는 오션뷰 방을 주셨기 때문이다. 알람보다 훨씬 일찍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바다너머 보이는 햇살이 눈으로 내리쬐었다. 아.. 진짜 얼마 만에 보는 해인가. 머무는 숙소에서 시작 포인트인 제주해녀박물관은 또 약 30분간 걸어야 했다. 이렇게 숙소를 멀리 잡은 탓에 올레길이 평균 19km 정도라 치면 도착-숙소-시작까지 계산하면 최소 2, 3 km는 더 추가된다. 만약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하면 또 놓칠 수 없는 맛집투어가 시작되면 30-40분을 추가로 걷는 건 다반사다.
걸으면서도 내가 돈을 좀 더 아낀다고 왜 멀리 잡았을까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다.
퇴사자에게는 돈을 줄여야 만한다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시작점이 도착하기도 전인데 비가 우두두 쏟아지기 시작했다. 급히 옆에 있던 편의점에서 아침을 해결하며 우비를 꺼내 입었다. 꺼내 입으면 뭐 하나.. 또 비가 그친다. 왔다 갔다 하는 제주 날씨는 정말 종잡을 수 없다. 그래도 오늘은 11.4km니까 올레코스 중에 거의 제일 짧은 루트에 속하니 만만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올레센터 분은 가는 길에 편의 점은 많이 없지만 카페는 많을 거라는 팁을 주시고 우릴 배웅해 주셨다.
오전길은 아주 순탄했지만 논밭사이를 걷다 보니 짝꿍이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밭 사이로 가로지르다 보니 거미줄이 많았고 선글라스를 꼈던 짝꿍은 커다란 거미줄을 몸 전체로 통과해 거미줄이 팔 여기저기에 끈적하게 붙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기나 진드기, 벌레 같은 것도 주변에 많아서 둘 다 몇 방씩 물렸다.
도대체가 만만한 길은 절대로 없는 것 같다.
오늘 코스에 지미봉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저 멀리서 보았을 때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해변을 따라가다 보면 지미봉은 보기만 해도 살짝 아찔했고 자꾸 돌아서 가는 코스가 아닐까 하는 현실 부정을 하고 있었다. 걷는 건 누구보다 좋지만 등산은 죽어도 싫은 나는 어떻게든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했는데 막상 지미봉에 다다르니 화살표, 간세 표지판, 리본까지 해서 총 3개의 표식이 지미봉 위를 올라가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아니..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는 거다..
너무 초입부터 무지막지하게 가파른 길이 나왔다. 계단이 아닌 게 어디야 안심하면서 가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오른쪽에 있는 로프를 붙잡으며 올라가기 시작했고 정말 끝도 없는 오르막이 나왔다. 보통 산을 올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희망이란 걸 갖고 있고 잠시 쉴 벤치라도 있다. 근데 이건 너.. 무.. 끝이 안보였다.
비가 가끔씩 떨어져서 우린 우비를 입고 있었는데 짝꿍은 이미 올라가는 중간에 벗어버렸고 나도 더 이상 차 을수 없어 잠시 멈춰서 우비를 벗으려고 했다. 근데 짝꿍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이 나올 것 같으니 그때 우비를 정리하자고 해서 갑자기 예민폭발해져 화도 냈다. 덥고 습하고 벌레는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욱하기 시작하니 내 성격이 어디 못 가는구나 다시 자괴감이 들었지만 한참 뒤에 도착한 지미봉은 종달리가 한눈에 보이고 성산 일출봉도 보이는 멋진 곳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힘들잖아
시원한 정상의 바람을 쐬고 나서 그래 내려가는 건 낫겠지 했으나 더.. 더 힘들었다. 맨 처음엔 또 로프에 의지하여 거의 미끄러지듯이 내려가야 했다. 나중엔 계단이 나왔지만 죽음의 계단 수준. 가방 무게 때문에 발을 살짝만 헛디딘다면 앞으로 고꾸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우리 둘 다 혀를 내두른 지미봉을 끝내고 나서는 점심을 먹어야만 했다. 오늘 등산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았으니 뭘 먹을까 고심하던 중 고기국숫집이 근처에 있길래 찾아가 보자 했는데 가장 최근 카카오맵리뷰에 영업이 종료됐다고 나왔다. 의심반 희망반으로 가보았지만 역시나 문은 닫혀있었고 조금만 더 가면 아예 종착지에 도착하는 상황.
다행히 바로 옆 편의점을 발견했고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만드신 고추냉이 김밥도 팔고 계셔 점심은 간단히 해결하기로 했다.
"너무 덥지 않겠어요? 편의점 2층에서 에어컨 켜고 먹지그래요"
"아니에요. 바다 보면서 밖에서 먹으려고요"
김밥두줄과 가락국수 음료수 2개를 사서 테라스로 나가는 순간 비가 우두둑 쏟아졌다. 왜 이것마저 우릴 안 도와주는 걸까. 민망하게. 난 바로 말을 바꿨다.
" 2층에서 먹을게요. 비가 와서요"
" 아유 진작 그러라니까"
역시 제주도민이시라 날씨를 잘 아시나 보다.
나름 성산뷰의 2층 편의점에서 김밥과 컵가락국수를 먹고 우린 오늘 올레일정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었다. 종달리는 21코스의 마지막이자 1코스의 시작이다. 1코스부터 시작했으면 오늘이 마지막이었을 텐데 어떤 모습일까 두근두근하며 도착했지만 저 멀리서부터 공사장 현장이 보였다. 산티아고 때는 성당과 광장이 있어서 도시를 진입할 때부터 가슴이 쿵쾅댔었는데 기대와 달리 21코스의 마지막 풍경은 공사장 옆이라니.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약 5년 전 혼자 여행으로 왔던 종달리의 기억은 좋으니 그것만 다시 회상하고 싶었다.
짝꿍은 평대리에서부터 당근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고 자신 있게 찾은 카페는 바로 약 5년 전에 왔던 그 카페가 아닌가?!! 사장님이 너무 잘생겼었던걸 기억한 나는 그날일을 신이 나게 설명하자 입을 삐죽 댔지만 당근 케이크를 포기할 순 없었나 보다. 질투심이 살짝은 나지만 그 카페는 가고 싶었던 거다. 아쉽게도 케이크가 없어서 머핀을 먹었지만 5년 전 혼자 와서 커피를 마시던 그 자리에 너와 다시 앉아있다. 그것도 우릴 힘들게 한 지미봉을 바라보며..
하루종일 오지 않던 비가 지금 추적추적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