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설마 스페인남자와 썸타니..?

2012 까미노

by Cielo

2012. 8. 1 (수)


어제는 새로 만난 한국인 2명을 포함해 저녁도 먹고 술도 먹고 하느라 일기도 못쓰고 자버렸다. 도시에서 출발하다 보니 건물들 사이에 화살표가 보이지 않아 길도 조금씩 헤맸지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오늘도 걸었다. 3명이 아닌 5명이서 같이 걸으니 먼가 든든하기도 하고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과자랑 과일을 주는 곳도 있어 알차게 챙겼다. 지난번 알베르게에서 잠시 마주쳤던 그때 스페인 남자와도 길을 같이 걸으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 스페인에서는 정말 투우 경기 끝나고 그 소를 잡아먹어?"

" 맞아. 하지만 요즘에는 투우 경기도 스페인 안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실제로 투우에 사용되는 소들은 약물을 복용시켜 흥분하도록 만들거든. 잔인하지. "


지난번 황소와 달리기 하는 마을 축제를 보고 와서 그런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스페인 현지인의 말을 들으니 내가 몰랐던 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는 우리 크루들은 다 낮잠을 자기 시작했고 난 잠이 오지 않아 스페인사람들 틈에 무작정 끼어있었다. 나름 족욕하는 장소가 있기도 했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나 스페인어를 듣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밌었다. 나 혼자 동양인인데 눈알만 굴려대고 못 알아 들는 눈치인 것 같으니 아까 만났던 스페인 친구가 사람들이 어떤 얘기를 하는지 친절하게 영어로 통역해 줬다.

눈은 왜 이렇게 크고 친절하기까지 한 건지..!


그 친구는 사람들이 지금 시내에 있는 성당으로 가이드투어를 간다며 같이 가지 않을래 제안해 주었다. 얼떨결에 스페인사람들 5명 정도와 섞여서 성당 내부를 구경하는데 고딕양식인지 언제 이 성당이 지어졌는지부터 하나하나 영어로 통역해 주었다. 너무 친절하고 감동인데 내 영어 실력이 그만큼 따라와 주지 않는 것 같아 속상했다. 성당 투어를 하고 나와서는 잔디밭에 누워 서로에게 좋아하는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기분이 이상하게 간질간질했다.


8일 차 걷고 있는 중인데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걸으니 벌써 헤어질 생각에 아쉽다. 멤버 중 한 명은 조만간 일정이 달라질 예정일 텐데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까. 강을 바라보며 잔디밭에서 노래도 듣고 다 같이 와인도 마셨다. 해가 저물어 가는 와중에도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웃다가 우린 왜 모두 싱글이냐고 한탄하며 저녁을 마무리했다. 힘들고 다리가 아파도 소소한 재미가 있기에 이 길을 걷는 게 아닐까.


오늘 몇 km를 걷는지 내일 얼마나 걸을지 알지는 못한다.

그냥 걷는 거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쉬었다가 걸으면 그게 까미노인 것이다.


2012. 8. 2 (목)


오늘도 멤버들과 걸어왔는데 요즘 자꾸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스페인남자가 사실 너에게 관심이 있는게 아니냐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순례길은 특히 길거리에서 순례자를 만나서 간단한 스몰톡을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멤버들의 설레발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으로도 살짝 몽글몽글한 마음이 피어오르는 건 사실이었다. 멤버들이 장난기 넘치는 날 쳐다보는 순간 그때에도 이 친구는 또 나를 찾아 인사를 걸어왔다.


이상하다.. 진짜 너 나한테 마음 있냐?!!!!
내가 살다 살다 외국인이랑 썸을 타는 건가?


하루 종일 같이 걷고 떠드는 순간들이 며칠간 출석체크처럼 계속되어 왔던 터라 나 스스로도 의심이 가는 건 사실이다. 보통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좋은 순례길 되렴! 하고 갈길을 가기 마련인데 이 친구와는 한번 대화를 시작하면 목적지까지 쭉 걸어오게 되었다. 잘 모르겠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 생각되기도 하고 아무런 생각도 없는 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언니 오빠 동생들과 같이 모두 다니는 것도 참 즐겁다. 지금이 제일 좋은데 이것도 곧 끝날 거라는 걸 알기에 슬프기도 하다. 같이 걷고 같이 웃고 떠드는 이 편안함과 소속감이 감사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각자 다른 목표와 다른 시간으로 가고 있다는 걸 인지해야 했다. 분명 이 모든 순간이 추억이 될 거라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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