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의 조용한 친절

2023 올레

by Cielo

2023. 7. 25 (화)


혼돈의 5 일째였다. 아침부터 비가 너무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마주한 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걸은지 한 시간도 안 됐지만 양말은 다 젖었고 점점 물웅덩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21코스의 종착점과 1코스의 시작점은 꽤나 멀다. 보통 같은 곳에서 시작하지만 안 그래도 우리의 숙소는 딱 가운데라 어제도 오늘도 우린 추가 30분을 더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출발도 안 했지만 온몸이 이미 물에 푹 젖어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가는 길에 너무 큰 물웅덩이를 만나 옆에 있는 밭으로 우회하려고 했지만 짝꿍은 앞서 걸어가다 결국 진흙에 아주 크게 빠져버렸고 신발 발목까지 진흙 투성이가 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안 그래도 깔끔 떠는 친구인데 뒤에서 뒤따라가던 나는 질겁하며 뒤로 갔지만 그래봤자 같은 진흙밭이라 내 신발도 처참했다.


1코스시작점의 스탬프도 빗속에서 겨우 찍고 올레센터도 찾았다. 신발도 말리고 양말도 벗어 말리고 물도 채우고 너무나 고마운 장소다. 센터에 계신 분께서 클래식 음악도 틀어주시고 젓은발만 뺀다면 꽤나 분위기 있었다. 1코스의 관건은 오전 산행이었다. 두산봉을 오르고 바로 쉬지도 않고 알오름을 가는 코스인데 지미봉을 겪은 우리는 이 정도는 괜찮다 생각했다. 심지어 성산 일출봉까지 한 번에 보이는 코스라 경치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아침 산행을 하다 보니 은근 시간이 소요될뿐더러 비까지 오는 상황이니 평소보다 걷는 게 더딜 수밖에 없었다.


산을 연속으로 두 개를 타니 배도 고프고 코스도 우리가 머물렀던 종달리로 돌아가는터라 점찍어둔 국숫집에서 멸고국수를 먹었다. 종달리의 어르신들만 가는 3 테이블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로컬 식당인 것 같은데 진흙을 잔뜩 묻힌 채로 가니 너무도 창피하고 죄송스러웠다. 동네 어르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계속 쳐다보셨지만 왠지 모르게 응원하는 게 느껴졌다.

외국인 남자와 한국여자가 배낭 메고 걸으면 너무 말을 걸고 싶을 것 같은데 무언의 분위기가 오히려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져 너무도 따스했다.

가끔은 물어보지 않는 침묵이 친절이 된달까.


점심을 먹고 나서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1코스이자 휠체어코스기도 해서 해안도로를 따라 쭉 걷는 코스였고 우린 중간에 카페도 들려 디저트도 먹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성산 일출봉과 계속해서 가까워지는 일정이었다. 보기엔 가깝지만 또 괜히 멀어지는 것 같고 성산 쪽에 오니 김녕, 종달리와 달리 사람이 많아지고 차도 많아지는 기분이었다. 우리 둘 다 조용한 시골로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금세 들었다. 광치기 해변도 생각보다 꽤나 큰 해변이었고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도 보았다. 정말이지 동영상 각이었는데 하며 계속 아쉬워했다.


그리고 성산 일출봉에 다다르기 전 산티아고 순례길 사인을 보았다. 어찌나 반갑던지! 1코스가 까미노와의 우정의 길이라서 그런지 너무 멋진 곳에 표식을 해놔서 잠시 뭉클했다.

앞에는 까미노 표식 뒤에는 성산일출봉 그사이에 우리 둘.

뭔가 우리를 표현하는 모든 걸 사진에 담을 수 있어서 상징적인 곳이었다고 생각한다.


C8A80A35-14C6-467B-8330-4A72332F0E25.heic



성산일출봉도 말도 안 되게 아름답고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이었다. 시계방향으로 걷던 우리는 이제 약 3시 방향쯤에 와있는 상태이다. 즉 5일째 딱 4분의 1 정도를 걸은셈이다.


어렸을 땐 뭘 해도 힘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해왔는데 이젠 이 시간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도 너무 날 어른으로 만든 것 같다.


이전 12화나 설마 스페인남자와 썸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