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
2012. 8. 4 (토)
멤버 다섯 명과 같이 건조하디 건조한 들판들을 지나왔다. 오르막길도 걷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걸어왔다. 사실 까미노의 일상은 생각보다 단조롭다. 걷고 웃고 떠들고 먹고 걷는 도중엔 별 생각을 다하니 갑자기 슬프기도 했다가 즐겁기도 했다가 아침에는 길을 잃어 한 시간이나 돌아가기도 하고. 서로의 꿈도 얘기하고 고민도 얘기하고.. 하루의 일과는 단조롭지만 그래도 감정상태는 생각보다 널뛰는 순례자이다.
전날 숙소에서 마주친 한국인을 거리에서 잠깐 마주했는데 영국에 사시는 의사셨다. 다른 외국인 순례자 한분이 갑작스러운 다리 통증을 느끼시는 걸 보고 바로 응급처치를 해주셨는데 그 현장을 보니 정말.. 멋지셨다.
이렇게 세상에 멋진 사람들이 많다는 걸 괜스레 다시 한번 느껴지는 하루였다.
오늘도 멤버들은 나에게 말 걸어오는 스페인남자 얘기를 하며 썸 타는 거 아니냐고 놀렸다. 내가 정말 외로워서 나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지 부추겨서 이러는 건지 걷는 내내 마음이 복잡하긴 했다.
아헤스라는 작디작은 마을에서는 다 같이 타파스를 시켜 저녁을 해결하고 다른 멤버들은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 나는 마을 주변을 서성거렸다. 마을의 작은 성당에 가서 기도도 드리고 놀이터에 놀고 있는 아기들도 구경하기 시작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점점 더 여긴 작은 마을인걸 다시 한번 느꼈다.
괜스레 매일같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던 스페인친구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나도 나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서 피해 온 것 같아 괜스레 눈물이 나려고 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던 그 순간 말도 안 되게 그 친구를 만났다. 자연스레 우린 같이 산책을 하기 시작했고 알게 모르게 그를 그리워했던 마음이 다시 몽글몽글 되살아 나는 듯했다. 가끔 확신이 들지 않았을 때는 직설적으로 물어봐야만 속이 풀리는 나였다. 어쩌다 스페인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이야. 안 되겠다. 그냥 저질러야만 했다. 난 그 친구에게 솔직하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 너 혹시 나 좋아하니?"
그러자 너무나도 동그란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는 대답해 주었다.
"응 난 널 좋아해"
충격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을 떨리지 않고 이렇게 직설적으로 내 앞에서 말을 하다니. 지금까지 재고 따지고 밀당을 필수로 여기던 나의 연애 방식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듯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담백하게 내 눈을 보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좋아한다고 얘기해 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전혀 창피해하지 않는 그를 보며 나도 네가 좋다고 대답해 주었다.
너무나 단순하면서 간단한 이 대화 하나를 위해 약 일주일간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나 자신이 조금은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스페인 땅에서 누군가를 만나 인연이 될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고민도 많고 무섭고 두렵기도 했지만 아헤스의 저녁만큼은 그 모든 게 상관이 없었다. 그냥 이 순간만 기억하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