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착까지 사랑해주는 너

2023 올레

by Cielo

2023. 7. 27 (목)


바로 지난주 목요일에 제주도를 왔는데 이렇게 일주일이 지나서 지금은 빨래방에 있다.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너무 좋은 조식이 나와 아주 든든하게 먹고 상쾌하게 시작했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다.

아침부터 해가 아주 쨍쨍 이었다. 역시 우리가 동쪽에 와서 그런가 제주시에 있을 때는 우중충한 날씨가 주를 이뤘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가 미칠 듯이 우릴 내리쬐었고 가는 내내 다시 비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3코스를 걷는 우리는 A 코스와 B 코스 중 나의 과감한 선택으로 무조건 B를 가자고 짝꿍에게 졸랐다. A 코스는 올레 공식 홈페이지에 별 3개를 달고 나온 보기 힘든 난이도 상을 보이고 있으며 산도 타야 하는 일정. 게다가 가는 길 내내 카페 하나 음식점하나 없는듯한 코스였다. 산을 좋아하는 짝꿍은 살짝 아쉬워하는 듯했다. 그렇게 산을 타고 싶으면 각자 A 코스, B 코스를 걷고 우리 종점에서 만나자라고 제안도 해봤으나 신혼여행인데 따로 걸을 순 없다며 우리의 결혼생활을 실수로 시작하고 싶진 않단다. 강경한 등산 거부권을 행사한 나는 결국 해안가를 따라 걷는 B 코스로 강행했고 결국 따라와 주었다. 스페인에서도 제주도에서도 결국 나를 따라오는 이 친구가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이 땡볕 7월에 산을 타면 시원하긴 하지만 모기들의 최애인 나는 거의 헌혈하러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만한 자원봉사는 이제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B 코스는 해변도로를 따라 걷는 만만한 코스겠거니 생각했는데 30도의 뜨거운 여름 날씨와 아스팔트에서 보이는 아지랑이는 우리의 고려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너무 이상하게도 바닷바람조차 불지 않고 고요하기 그지없어 도대체 우리의 땀은 어디서 말리나 고민했고 그 해답은 카페였다.


원래 일정이었다면 찾아놓은 고기국숫집을 점심으로 가려고 지도에 저장했는데 아스팔트 도로다 보니 생각보다 우리의 걸음이 다른 코스보다 빨랐고 점심을 먹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과 짝꿍이 노래노래를 부르던 당근케이크를 먹었다. 카페 안에서 보는 바다는 왜 이리 청명하고 모든 게 이뻐 보이던지. 에어컨 있는 그 풍경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건만 땡볕에 저 길을 다시 걸을 생각을 하니 바닷풍경조차 눈을 찔끔 감게 하고 서둘러 아메리카노에 눈을 돌렸다. 카페에 계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올레길 걷냐고 물어보신 후 우리를 응원해 주셨고 우린 다시 길을 떠났다. 카페 바로 옆에는 작은 무인 책방도 있어 살짝 구경하고 기분도 잔뜩 좋아져 사진도 찍은 게 우리의 잘못이었다.


뙤약볕에서 말도 없이 쭉 걷다 보니 길에 있는 올레 표지판에는 이미 7km를 걸었다고 나오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코스가 14km인데 반을 걸었으면 지금쯤 스탬프를 찍어야 하는데?' 올레길 걸은 첫날 중간스탬프를 놓칠뻔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서 확인해 본 나는 우리가 중간 스탬프 지점을 한참이나 지나온 것을 확인했다. 갑자기 절망에 이르렀다. 웃고 떠들고 사진 찍느라 중간 스탬프도 못 보다니..!! 바다에 정신이 팔려 스탬프를 못 찍다니..!


카페쿠폰, 적립쿠폰등 온갖 적립, 마일리지, 포인트는 꼭 다 챙기고 모으는 성격인 내가 심지어 올레길 스탬프를 놓쳐? 이건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돌아가는 데에 최소 30분이 걸리고 이미 왕복이면 한 시간을 소요하는 일정인데 그건 정말이지 무리 일수 밖에 없다. 거의 울먹이다 싶을정도로 침울해진 나는 스탬프 확인을 같이 못했다는 이유로 짝꿍에게도 화풀이를 했고 우린 말도 없이 계속 걸었다.


스탬프 하나 때문에 침울한 마음은 계속 됐지만 더위는 계속 됐고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느새 바다목장에 도착하여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소 때무리도 보게 되었다. 한쪽은 파도가 거세게 치는 절벽인데 한쪽은 넓디넓은 초원에 소들이라니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광경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해안도로를 가다 보니 우린 정말이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다는 걸 알았고 정자에서 땀난 발도 말리고 편의점에서 사이다 한잔도 마셨다. 편의점 바로 앞에는 가족 풀장이 있었는데 자유롭게 수영하는 애기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다 내던지고 나도 수영하고 싶었다. 더위만 빼면 완벽했던 코스가 끝나고 표선해안에 도착했다.


동남쪽 해안을 처음 와봤는데 사람도 많고 가게도 많고 시골에서 도시로 온듯한 느낌도 들었다. 스탬프를 찍고 올레센터에서 중간 스탬프를 못 찍었다고 하소연하니 원래 그런 올레꾼들이 만다고 하셨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찍으라고 하셨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던 나는 빨래방에 온 지금도 결국 버스를 찾아보았고 겨우 30-40분 거리에 다녀올 수 있는 여정인걸 알게 됐다. 이 스탬프 하나가 뭐라고 이리 집착하는 내가 나도 싫었지만 하루종일 침울해왔던 짝꿍은 결국 게스트하우스를 뛰어가서 올레패스포트를 가져오기로 했다.


이게 뭐라고 20분 도보거리를 다시 가주는 내 남편에게 진짜 잘해야겠다 싶었고 괜한 고생시키는 건 아닌가 별생각을 다했다. 빨래가 다 되는 동안 게스트하우스까지 달려갔다 온 짝꿍은 패스포트를 들고 왔고 우린 서둘러 버스를 타러 갔다. 올레길은 걷기 시작한 후 처음 타보는 버스였다. 제주버스는 워낙 배차간격이 기니 서둘러야 했다. 6분 컷으로 빨래방에서 정류장까지 뛰어간 후 버스를 탔다. 그것도 일주일치 빨래를 짊어지고


버스를 타니 표선 해안에서부터 중간 스탬프까지는 10 정거장이었지만 오늘 하루의 반이상 걸었던 거리가 버스 10분 컷으로 끝난다는 게 왠지 모르게 허무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간 스탬프 중간지점에 도착하니 너무 말도 안 되게 음식점 앞에 떡하니 스탬프가 있었다. 도대체 우린 왜 이걸 못 봤나 땅을 치며 후회했고 바로 옆 슈퍼에서 음료수하나를 사서 마신뒤 에어컨이 짱짱 히 나오는 버스를 타고 우린 돌아갔다.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왜 이런 나의 말도 안 되는 집착을 도와주냐고.

그러자 그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소한 집착도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된다고 했다.


오히려 하루종일 시무룩해진 나를 본인이 해결해 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이렇게 이상한 나마저 사랑해 주는 네가 참 신기하고 감사할 뿐이다.

나의 부족한 모습과 너의 너그러움을 확인하는 이 올레길이 진실된 신혼여행 같은 느낌을 주었다.



진짜 내일부터는 눈을 크게 뜨고 양옆위아래 모든 걸 눈에 담고 놓치지 않고 걸을 것이다.



D1F9B6A9-8312-4F22-BB91-DF67A6076FAD.heic


이전 16화서른을 넘기고 알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