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올레
2023.7.28 (금)
너무 다행히도 오늘은 날씨가 흐렸다. 어제 더위에 지쳤던 우리는 제발 흐려라 아니 그럼 바람이라도 많이 불어라 빌고 빌었다. 오늘 4코스는 오랜만에 19km이다. 다시 긴 코스를 걸으려니 긴장이 팍 됐다. 심지어 우리가 묶었던 숙소는 스탬프 지점까지 30분이나 걸어 야한 거리라 2km를 추가로 걸어야 했다. 다시 한번 내가 왜 스탬프와 숙소사이의 거리를 안일하게 계산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좋다는 건 지도를 보니 해안가도로와 잠깐씩 숲으로 살짝 우회하는 코스만 있을 뿐 어려워 보이는 길은 없어 보였다.
올레센터에 계신 아주머니는 우리의 신혼여행과 간략한 스토리를 들으시더니 너무 반가워하셨다. 그분도 8월에 독일을 간다고 하셨고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보다 더 흥미로워하시며 간세 마크 앞에서 아주 이쁘게 사진을 찍어주셨다. 아침 올레길은 그래도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거미줄을 다 물리치는 자연의 길이었으나 여전히 거미줄을 볼 때마다 '악'소리를 내는 짝꿍 때문에 나는 '아이고'라고 반응해 주는 시간이 늘어났을 뿐이다. 날씨는 좀 얄밉게 내가 흐리다고 했지 습하다고 한 적은 없다?! 를 시전 하며 거의 91% 습도로 우린 걷고 있었고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우리는 예상과 달리 갑자기 어느 리조트의 실내카페로 가게 되었다.
모든 가족들이 아기들과 물놀이를 하는데 그 속에 땀에 젖은 우리 둘이 너무나도 다름 그림체고 카페에서 수혈을 하는 느낌이었다. 카페에는 단호박 에그마요 샌드위치도 있어 갑자기 요깃거리로 샀는데 아주 맛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좋은 간식이었다. 좀 더 길을 걷다 보니 귤밭도 보였다. 아직 익지 않은 건지 아님 청귤인지는 모르겠지만 새파란 귤들을 보니 번쩍하니 생각이 들었다.
맞다. 나 제주도에 있지
매일매일 걷다 보니 오늘 하루의 목표와 숙소와 점심 저녁을 생각하기에도 바빴던 일상에 귤밭을 보니 제주도의 시그니처! 를 본 느낌이랄까. 사실 귤밭도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표선에서 남원을 가는 길은 끝도 없는 바닷길이지만 고개를 돌리면 공장들과 양식장들도 꽤나 많았다. 바닷바람도 엄청 세서 파도가 무서울 만큼 해안가의 돌들을 때리고 있었다. 전부터 해산물과 한식에 살짝 지쳐있었던 우리는 오늘 점심은 양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바닷가 가까이에 있던 파스타 피자가게를 갔는데 계란으로 만드는 찐 이탈리안식 까르보나라만 독일에서 먹다가 한국식 찐 크림 그득한 까르보나라를 먹으니 잠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기억도 살짝 스쳐갔다.
레스토랑에 있는데 하루종일 오지 않던 비가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딱 들어오자마자 비가 오니 우리에겐 얼마나 천만다행이던지 점심을 먹고 나와서도 길은 나름 순조로웠다. 오늘의 길은 19km 긴 하지만 날씨가 우리를 도와줘서 살아남은 것 같았다. 그와 달리 이상해지는 나의 몸이었다. 종아리 부분이 아주 빨갛게 변해있다. 아마 풀독 때문에 빨갛게 부어오른 듯한데 이번주내로 없어지지 않으면 약국에 가야겠다. 어제까지 이미 100km를 걷고 곧 서귀포도 도착한다. 제주도를 위아래 양옆 다 보게 될 줄이야. 다 걸어보니 마을의 분위기 사람들이 점점 자세히 보이기 시작한다.
더 신나게 이 길을 흠뻑 걸어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