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되어도 너랑 걸을래

2023 올레

by Cielo

2023. 7. 29 (토)


9일째다. 잘 걷던 내가 일주일이 지나니 몸이 점점 성치 않기 시작했다. 그래 일주일은 잘 버틸 수 있었지 근데 중반이 다가오니 아침부터 온몸이 쑤시고 갑자기 오른발 관절도 걸을 때마다 아프기 시작했다.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렀던 걸까. 자세가 안 좋아져서 더 다치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어제도 다리에 풀독이 오른 건지 빨갛게 점이 생기고 부어올랐다.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런 다리를 계속 보고 있는 게 쉽지 않았다.


오늘은 남원에서 쇠소깍까지 가는 일정. 아침에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 캔커피, 삼각김밥을 클리어하고 길을 나서니 역시나 올레센터에 계시던 분도 출근하셔서 우리를 응원해 주셨다. 날씨는 햇빛 없는 흐린 날씨라 걷기에 정말 딱 좋다 생각했다. 5코스 초입에는 큰엉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의 바다 옆 절벽이었다. 절경은 진짜 너무 멋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너무 아찔해 무섭고 특히 큰엉의 중간 진입접에서는 화산돌을 밟으며 지나가는데 아.. 이렇게 발을 한벗 헛디디면 정말 나락이겠구나 싶었다. 왜 오늘의 코스가 13km인데 난이도 중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걷는 당시에도 다른 올레꾼 2분이 우리의 속도와 비슷하게 오고 계셨는데 아마 내가 몇 번이나 악! 소리 지른 걸 들으셨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정말이지 절경만큼은 끝내주게 멋있었고 마지막쯤엔 나무와 길의 모양이 딱 한반도 모양으로 보이는 사진스폿도 있었다. 멋진 풍경에 비해 그래도 걷는 건 여전히 힘들었다. 오늘의 코스는 13km밖에 안 됐지만 도무지 걷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는 건축학 개론에 나온 서인의 집나 오는데 지나가면서도 그 장소가 여기에 있다니 신기했다. 지금은 그 장소가 카페가 되어있었지만 올레길에서 우연찮게 보는 명소를 보면 괜히 반갑다. 걷는 길에 혼자 전람회 노래도 흥얼거렸다.


또 하나 좋았던 건 해변도로에 제주도 방언을 써놓은 작은 글귀들이 붙어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발견했다.


하르방 할망되서도 손 꼭 잡고 이 길을 거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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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순례길에서 만나 제주도로 신혼여행온 우리 앞에 보였던 그 글귀 하나가 내 눈을 잠시 시큰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건강하게 같이 오래오래 늙어가고 어디서든 손잡고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 나에게 있어서 너무 행복하지만 벌써부터 남편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무서운 상상도 한다. 딱 하루만 내가 먼저 세상을 떴으면 좋겠다. 나 혼자 이 세상에 남기에는 너무 슬프다.


오전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오후의 올레는 그래도 수월한 편에 속했다. 올레길 처음에는 길에서 만날 사람들을 보면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는데 지금은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나도 모르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가고 같은 길을 걷는 그분들에게 응원을 전해주고 싶었다. 동네를 지나가다 보면 할아버지도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시곤 했다.


내가 몰랐던 제주도의 진짜 감성은 인스타그램이 아니라 길에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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