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
2012. 8. 8일 (수)
15일째 걷는 중이다. 메세타 고원은 잔인하게 덥고 점점 더 체력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어제는 무려 하루 만에 35km를 걸으니 아침부터 춥기도 하고 한 시간 동안 길을 헤매기도 했다. 이 와중에 드디어 물집도 나기 시작했고 여름이라 모기도 물렸는데 온갖 외국인들이 내 눈이 왜 그렇냐며 측은함을 보여줬다. 살다 살다 눈에 모기가 물려서 이렇게 초라한 꼴로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날 줄이야. 운도 지지리도 없지 심지어 들고 온 카메라도 고장이 나는듯하다. 이 팍팍한 메세타 고원에서 다리엔 물집이 나있고 눈엔 모기가 물려서 눈도 잘못 뜨는데 카메라 고장까지 한꺼번에 오다니 메세타는 정말 쉬우면서 어려운 곳이다.
같이 걸었던 5명 중에서 나와 다른 언니 둘만 남고 모두가 각자의 길로 떠났다. 우리 모두 일행은 아니었고 순례길에 만난 사람들이긴 했지만 서로를 의지하면서 걷던 와중에 나는 스페인친구 (이하 짝꿍)을 나름 만났고 내심 우리의 행보도 결국엔 달라질 것이라는 걸 나도 모르게 예측하고 있었다. 지금은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싶고 그 와중에 내 시간은 가지고 싶은데 욕심만 그득한 것 같다. 만남 뒤에 이별이 분명히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왜 난 이게 익숙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같이 걷는 언니도 슬며시 본인의 플랜을 얘기해 주기 시작했다. 까미노의 중반을 걷고 있는 우리는 점점 더 속도 차이도 나기 시작했고 몸상태도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나는 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당연히 순례길은 본인의 선택이고 그 속도도 본인이 정해야 하는것이니 언니만의 길을 걷는 걸 응원해 주기로 했다.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싶어 했고 난 그에 반해 내가 정해져 있는 거리를 채워야지 여름방학의 일정과 맞았기에 우린 결국 내일 까지만 함께 하기로 했다.
벤치에 앉아 짝꿍에게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와 같이 다니던 한국인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그러자 그 친구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제안해 주었다.
나랑 같이 걷지 않을래?
머리가 띵해져 왔다. 안 그래도 스페인남자와 썸을 타는 것도 나에겐 처음 있는 일인데. 혼자 걸으러 온 이 길을 이 남자와 걷는다고? 앞이 살짝 깜깜해졌다. 누군가와 24시간을 같이 있어본 적도 없고 이렇게 하루종일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그것도 하루종일 걷는 일정인데 내가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들이 스쳐지나 왔다.
어차피 혼자 걸으러 온 스페인인데 이 친구 없이도 혼자 갈 수는 있다. 근데 산티아고 성당을 같이 가서 보고 싶기는 하다. 잘 모르겠다. 어떡할지 한참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이 친구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래 졌다. 그냥 해보자. 하루하루 후회 없이 살기로 했으니
최선을 다해 이 친구와의 순간을 기억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같이 걷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