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올레
2023. 7. 26 (수)
이제는 햇빛을 걱정하는 6일째이다. 내내 비만 와서 해는 언제 보나 걱정하던 찰나.. 아 다시 비 왔으면 좋겠다 생각까지 했다. 너무 오래된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던 우리는 쿰쿰한 냄새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고 거의 6시에 잠에서 깼다. 빨리 게스트하우스를 벗어나고 싶었던걸 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먹고 7시도 채 되지 않은 거의 6시 반쯤 올레길을 출발했다. 보통 7시 반에서 늦어도 8시 반전에는 출발했던 우리인데 이렇게 일찍 출발하니 까미노도 생각나고 둘 다 신나 있었다.
아침은 안개가 잔뜩 껴있어 생각보다 많이 습했다. 차갑디 차가운 아침바람을 생각했지만 내 기대는 철저히 무너지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오늘의 코스는 오전에는 성산일출봉을 옆으로 두고 숫자 9 모양으로 돌고 오전은 식산봉 오후에는 대두산봉 두 개의 산을 타는 일정이었으나 하필 일찍 일정을 시작하는 바람에 오전 내에 두 번 등산을 하는 하드 한 일정이 되어버렸다. 카카오맵을 보니 2코스를 우회하는 것도 쓰여있던데 왜 그럴까 보니 만약 물이 차오른다면 아예 걸을 수 없는 길이 되는 것 같던데 실제로 겪어보니 그럴만했다. 만조시에는 길이 정말 찰랑찰랑 거릴 것 같았고 대신 식산봉은 생각보다 작디작은 산이라 훌러덩 올라갈 수 있었다.
거의 다 한 바퀴로 도는 중간에 짝꿍이 '이럴 수가' 하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너무나도 작은 다리 하나가 있는데 양옆으론 장마라 물살이 세 보였고 작은 다리는 말이 좋아 다리라고 할 뿐이지 나의 오른쪽 발크기 만한 너비의 간격이었다. 양발을 써서 건널 수가 없고 왼쪽 한발 오른쪽 한발 폴짝 디스 건너가야 하는 정도의 얇은 다리였다. 짝꿍은 훌러덩 넘어갔지만 상상력 풍부한 나는 거의 시나리오 100개를 쓰고 있었다. 안 그래도 무거운 배낭까지 메고 있는데 무게 중심을 잘 못 잡아 발을 헛디디는 영상만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왜 하필 이 길만큼은 우회하는 길도 없는지 이게 뭐라고 이 다리 하나 걷는 게 무서운지 알 수 없었다. 다리 앞에서 울기 직전으로 10분 동안 징징대다 겨우 건넜지만 다시 생각해도 난 그 길이 끔찍하다.
다시 큰 도로를 마주한 우리는 우선 산 하나를 넘었으니 다음 산인 대수산봉만 기다리고 있었다. 산이 싫은 것 중에 하나는 모기이다. 땀도 흘리고 사람도 많이 안 다니는 산모기에게는 우리는 그저 걸어 다니는 달콤한 사탕이다. 나는 더더욱 모기에 잘 물리는 사람이니 오르기 전에 정자에 쉬어 모기 퇴치제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올라갔다. 대수산봉은 지미봉의 악몽이 떠오를 만큼 은근히 힘들고 가팔랐다. 올라가는 길이 또 끝도 없이 이어지고 해가 내리쬐는 터라 우린 거의 대화 한 톨 없이 모든 에너지를 산행에만 쏟고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산을 오를 때는 땅만 보고 가는 게 좋다. 너무 멀리 볼 때는 저 정상이 너무 아득한 것 같고 때때로 올려다보면 끝이 없는 것에 대해 실망을 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걸.
서른 살 먹고 드디어 알긴 안다.
그것도 안다. 이럴 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묵묵히 걸어야만 한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렇게 정상에 도착하면 그제야 지나온 성산 일출봉도 보이고 제주도가 다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신발을 벗어 땀도 말리고 크게 팔 벌려 바람도 느끼면 된다. 그렇게 또 미련 없이 정상을 즐기고 내려오면 된다.
우리는 산이 다일줄 알았는데 산을 내려오고 나서 힘들 줄은 몰랐다. 5일 내내 보지 못했던 해는 오늘 다 봤다. 심지어 내리 걷는 길이라 집도 없고 편의점도 없고 바다는 이럴 때 망망대해라고 하는데 숲에는 없나. 망망대숲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이지 조용한 길을 걸으면 생각보다 평온할 줄 알았지만 아-무겠도 없는 그 길도 우리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조금 걷다 보면 혼인지라는 곳이 나온다. 설화로 유명한 곳인데 예쁘게 한옥도 있고 살짝은 더러웠던 작은 연못도 있었다. 혼인지를 지나면 그제야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얼마나 바다가 그립던지. 해가 아무리 내리쬐도 바다가 주는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무 배가 고팠던 우리는 스탬프도 찍으러 가지 않고 바로 식당 앞으로 가서 점심을 해결했다. 오전부터 쏟아졌던 허기와 목마름이 한꺼번에 해결됐다. 온평에 도착해 보니 내가 살면서 이런 조용한 시골에 와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녕, 종달리보다 더 제주도민이 많이 사는 느낌. 지금은 조용한 빵집 겸 카페에 와있는데 사장님은 온평에 오신 지 얼마 안 되시는 분 같았다. 사장님은 다른 손님과 얘기 중이셨는데 귀를 크게 열어서 들어보니 코로나가 끝나 많은 관광객이 모두 해외로 나가서 유입인원이 많이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짝꿍과 제주도에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올레길 걸으며 항상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는데 이런 걸 들으면 어딜 가나 현실은 다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오늘 하루도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오늘을 마무리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