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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o Oct 03. 2023

처음 같이 걷던 날

2012 까미노

2012. 8. 10 (금)


같이 걷던 언니와 마지막 만찬과 작별을 나누고 그렇게 난 순례길에서 만난 어떤 스페인남자와 길을 같이 걷게 되었다. 나 혼자 시작했던 일정을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건 두려우면서 설레기도 하는 큰 결심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굿모닝을 말하고 같이 아침을 먹고 깜깜한 새벽에 나와 불을 비추며 같이 걸어왔다. 어두운 길을 함께 걷는다는 것. 두렵지도 않고 그냥 좋기만 했다. 나 혼자라면 무서웠을 그 길을 함께 별을 보며 걸었다. 


메세타는 여전히 끝이 없어 보이지만 나름 익숙해지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는데 지난번에 숙소에서 만났던 스페인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매해 순례길을 걷고 있는 일명 슈퍼마리오아저씨. 콧수염이 마리오 같아서 나 혼자 그렇게 불렀는데 보시자마자 너 남자 친구 어딨어?!! 라며 화끈하게 놀려주셨다. 이렇게 다른 순례자들을 길에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도 괜스레 반갑다. 


반가운 얼굴을 다시 보고 나서 계속 걷기 시작했는데 아니다. 난 메세타에 익숙해진 게 아닌 거란 걸 깨달았다. 사막 같은 메세타는 끝없이 펼쳐지는 길이라 너무너무너무 힘들었다. 그늘도 없고 마을도 없고 도저히 쉴 공간을 보이지가 않는 황량한 그곳. 순간 나 혼자였다면 바로 무너졌을 텐데 이 친구가 옆에 있어줬다는 게 참 고마웠다. 내가 피곤하다 힘들다고 투덜대는 걸 다 받아주고 계속 응원해 주는 주는 걸 보고 신기하기도 했다. 나라면 정말 짜증 났을 텐데. 이런 나를 다 이해해 주는 이 사람이 너무 고마워서 말했다.


나와 함께 걸어줘서 고마워 



나의 이 마음이 과연 전해졌을까. 어쩌다 순례길에서 만나 같이 걷게 되었지만 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점점 더 생기는듯하다. 마을에 도착해서도 같이 샐러드와 빵을 나눠먹었는데 짝꿍이 칼에 손을 베여 피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엄청 큰일이라도 날듯 호들갑을 떨었는데 순간 이런 나의 모습이 낯설어 웃음이 나왔다. 피곤한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고 나밖에 모르던 내가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앞뒤 재지 말고 후회 없이 사랑해 보는 거였는데 지금 이 순간 내가 그걸 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23살 여름은 이렇게 지나가게 되는 걸까. 

메세타고원을 지나고 도시에 도착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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