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
2012. 8. 15 (수)
폭우가 쏟아지는 깜깜한 새벽부터 시작해 오늘 하루만 총 32km를 걸어야 했다. 비도 오고 어깨도 아프고 아침부터 일찍 걸어가는데 너무 힘들었다. 매번 스페인의 맑은 날씨만 보다가 비까지 오는 상황이라 이런 조건에 걸을 줄은 몰랐다 정말. 까미노를 걸으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힘든 날 중에 하나였다. 오늘로써 22일째 걷는 날이라 체력적의 한계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짝꿍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날 위해 보폭을 맞춰주고 걱정해 주며 같이 걸어주었다. 이 친구가 없었더라면 난 과연 순례길을 혼자서 걸어냈을까.
오전에 들렸던 바에서는 군인인 스페인 아저씨를 만났는데 흡사 한국의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을 풍겼다. 짝꿍과 우리 둘의 사이를 가늠하시고선 까미노가 끝나면 우리 둘은 어떻게 되는 거냐며 한 마디씩 거드셨는데 너무 직설적이라 우리 둘 다 눈을 굴리며 뻘쭘해졌다. 우리도 우리가 어떻게 될지 사실 모른다. 이 친구는 순례길이 끝나면 올해 9월부터 내년 6월까지 프랑스에 교환학생을 하고 나는 내년 2월까지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우린 진짜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친구의 마음은 무엇일까.
오늘의 목적지인 폰페라다를 가는 길은 산을 걸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코스이다. 비도 오고 날씨도 추운 탓에 등산을 하는 게 꽤나 몸이 무거웠지만 산정상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소원도 빌고 돌아왔다. 워낙에 유명한 곳이라 안개가 꼈음에도 순례자들이 주변에 많았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코스에는 황량한 마을이 있었다. 순례길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종종 있긴 하다. 예전에 수도원이 되었다가 이제는 순례자숙소 (알베르게)가 된 곳도 있고 레스토랑이나 바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버려진 마을 같은 만하린에서는 한국국기도 발견해 자랑스레 사진도 찍어보았다.
날씨는 점점 좋아지기 시작해서 도착할 때쯤엔 해가 쨍쨍했다. 폰페라다에는 공립알베르게가 한 군데밖에 없어 모든 순례자들이 이곳으로 총집합한다. 씨에스타시간에 잠이 오지 않아 벤치에서 쉬고 있었는데 마당에서 기타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 나도 모르게 나와보았다. 한 남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 소리에 이끌려 순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작은 콘서트 같은 느낌이라 평화로운 미니 콘서트 같았다.
작은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는 짝꿍의 대학교 친구 2명이 도착했다. 둘 다 스페인 여자애인데 한 명은 빨간 머리에 너무 사랑스러운 친구였고 또 다른 친구는 쿨한 여신 같은 이미지였다. 대학교 친구들이라 짝꿍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나를 아주 좋아해 주고 관심 가져줘서 너무 친해지고 싶었다. 더 귀여웠던 건 짝꿍을 알고 지낸 시간 동안 너를 만나서 제일 행복해 보인다고 말해줬다. 괜스레 부끄러웠지만 내심 기분 좋은 말이었다.
우리는 이제 총 다섯 명이다. 이탈리아 남자 1명 , 스페인 남자 1명, 스페인 여자 2명 그리고 나..
어쩌다 이탈리아+스페인 그룹에 낀 애매한 아시아인이라니. 그래도 남은 까미노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