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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o Oct 07. 2023

올레길은 사실 아마존이었다

2023 올레 

2023. 8. 2 (수)


아침부터 에어비엔비 호스트님이 엄청난 배웅을 해주셨다. 샐러드도 만들어주시고 얘기도 한 뒤에 떠날 수 있었다. 작고 귀여운 오래된 가옥에서 고양이들과 살고 계시는 호스트님은 중간중간 여행도 다니시는 멋진 분 이셨다. 다시 한번 인생은 참 다양하게 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기자기하게 조용히 제주에 사시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스트님은 9코스를 걸으실 거냐고 해서 나는 난이도가 상이라 걱정된다고 했는데 그냥 언덕 정도의 산이 나올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하셨다. 난이도 상을 믿을지 아님 현지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우선 오늘도 떠나보는 거다. 


코스의 시작부터 물질이라는 곳을 만났는데 너무나도 야생 중의 야생이었다. 앞에서 뭐가 튀어나와 자세히 보면 고라니인지 사슴인지 모를 동물이 아이컨택을 하기도 했고 앞서가던 짝꿍은 뱀을 만나기도 했다. 그 길을 지나가는 것조차 싫었지만 숨어있는 뱀을 무시하고 지나가야 했다. 올레길이 이렇게나 와일드할 줄이야. 지난번에도 생전 처음 보는 파란색 잠자리라던지 다양한 색깔의 나비도 보았는데 내가 지금이라도 이 곤충들을 채집해서 동물의 숲 부엉이한테 기증하면 박물관을 다 채울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도 하고 괜스레 나의 섬 주민들이 그립기도 했다. 


9코스의 정점은 군산 정상을 오르는 거였다. 산헤이터인 나에게 올레길이 자꾸 등산을 하라고 하면 아침부터 눈을 질끈 감게 된다. 왜 이러시나요 나에게. 그래도 군산으로 향하는 길 자체가 꽤나 오르막길이라 오히려 진짜 산을 마주하게 된다면 조금 더 평평한 길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군산을 오르는 길목조차도 역시 와일드했다. 난이도의 기준은 사실 체력의 한계가 아닌 길이 얼마나 포장되어 있나 아닌가의 유무인듯했다. 경사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삐져나와있는 나무들과 바로 옆 낭떠러지 같은 좁디좁은 길이 난이도를 올린 것 같았다. 그리고 정상까지의 길이 아주 길고도 길었다.  아 이 정도로 걸었으면 정상이지 싶은 순간에도 끝내 정상은 나오지 않고 기나긴 길을 통과해서 큰길로 나올 때쯤이면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이렇게 희망고문을 계속 당하면 그때의 기분은 참담하긴 하지만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위를 보지도 않고 발바닥에 느껴지는 계단 하나하나만 보고 올라가면 된다. 


31도의 날씨와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산 정상의 시원한 바람은 어떤 에어컨도 따라오진 못한다. 난 도장을 찍자마자 의자에 앉아 쉬었지만 짝꿍은 진짜 정상을 찍어야 한다며 조금 더 걸어가서 사진도 찍었다. 아주 정석이지 매뉴얼인 친구다 정말. 군산 주변엔 동굴도 있어서 길이 여러 갈래가 나왔는데 기회가 된다면 동굴도 꼭 한번 가고 싶다. 그래도 오전의 군산 등반을 마쳐놓으니 마음이 짐이 덜 해지는 것 같았다. 후엔 창고천을 따라 쭉 걸어가는 길이 있었는데 안덕계곡도 보고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산 타고 계곡도 보게 되니 조금은 시원해져서 좋았다. 마지막까지 와일드한 길은 계속 나와서 이건 진짜 아마존이 아닐까 싶은 풍경도 보였고, 쥐인지 토끼인지 모를 생물체도 종종 봤다. 오늘 하루 고라니 2마리, 살아있는 뱀 한 마리 , 죽어있는 뱀 한 마리와 각종 벌레 등등 오늘 하루만큼은 동물의 왕국 같았다. 이제 산에서 만나는 모기쯤은 우습게 여겨야 한다. 


11km의 짧은 길인지라 화순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짝꿍이 찾아놓은 맛집에 가서 웨이팅까지 하는 여유도 생겼다. 스페인애가 어떻게 카카오맵으로 현지 맛집을 잘 찾는지 다시 한번 신기하다. 튀김돔베구이 정식을 먹었는데 만원의 가격이 믿기지 않을 만큼 반찬도 맛있고 심지어 양념게장까지 아주 풍성히 나온다. 정말 로컬 맛집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조금만 걸어오다 보면 금세 화순금 모래해수욕장이 나오는데 정말이지 발 한 번만 담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징징거려 봤지만 우선 카페를 먼저 가고 싶어 했던 짝꿍의 말에 따라 지금은 카페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다. 에어컨바람을 쐬니 너무 좋긴 하지만 이렇게 바닷물 한번 못 느껴보고 독일에 돌아가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 물에 첨벙 까진 아니더라고 발끝에 제주 바다 한 번쯤은 담가보고 갈 것이다.


올레길에서 느끼는 점은  휴양하러 왔을 것 같지만 은근 삶이 바쁘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종일 걷고 점심도 식당을 찾아서 해결해야 하고 밥을 해결하면 빨래, 샤워, 짐정리등 조금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저녁엔 동네 구경을 하며 저녁을 해결하다 보면 다음날이 어느새 와있고 또 어느새 걷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단순한 하루들이지만 하루의 목표가 정해져 있고 그걸 해내는 우리의 삶이 앞으로도 평생의 삶이지 않을까 싶다. 


이 여름에서 난 무엇을 얻어 갈까 생각해 보았다. 사실 잃는 게 많기도 하다. 3주 동안의 어마무지한 돈과 새하얗던 나의 피부, 이제는 물집이 생기기 시작한 발까지. 근데 이 모든 걸 다 잃고 얻는 거라면 자신감인 것 같다. 이 길을 다 걸어내면 난 모든 걸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인 것 같다. 

독일에 돌아가서도 이 자신감 잃지 말고 소중히 마음의 유리병에 담아 가서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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