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
2012. 8. 18 (토)
트리아가스텔라. 마을의 이름은 3개의 섬이지만 정작 섬은 없는 마을에 도착했다. 오늘의 일정은 약 20km를 걸어야 했길래 여유롭게 출발했다. 이제는 총 5명이 된 우리 그룹은 매일이 시끌벅적했다. 나는 걷는 도중 스페인 친구들에게 스페인 노래를 배우게 되었고 친구들은 나에게 한국의 곰 세 마리 송을 배우기도 했다. 까미노 초반에 한국인들과 다니다 이렇게 스페인 그룹에 있게 되니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하지만 친구들과 다 같이 있는 게 즐거우니 확실히 둘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긴 했으나 쿨하고 멋진 친구들 덕분에 매일매일이 즐거워졌다. 가끔은 다 같이 있어도 혼자 동양인이니 외롭고 우울해질 때도 있지만 결국 내가 노력하기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오늘로써 25일째 걷는 중인데 짝꿍은 점점 피로가 쌓였는지 말 수가 줄어들었다. 슬픈 건 내가 아무것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불어서 나도 몸의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방 때문에 어깨가 아픈 건 당연하다 치고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난 당연히 모기에 물린 줄 알았건만 도착해서 팔토시를 벋고 팔을 보았더니 팔 전체에 두드러기가 나 있었다. 모기에 물린 흔적과는 차원이 다르게 작은 자국들이 시뻘겋게 팔을 뒤덮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보는 순간 더 간지러운 느낌이 날 정도였다. 마음속으로 아니겠지 하고 끊임없이 외면하고 있었던 베드버그가 확실했다.
베드버그는 순례길을 준비하고 있을 때부터 전설처럼 들려오는 악몽 같은 벌레다. 한국말로 빈대인 베드버그는 말 그대로 침대에서 물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순례자들이라면 한 번쯤 물린다고도 하고 아니면 잘 넘어간다는 사람도 있다. 독일에서부터 순례길을 준비할 때에도 설마 내가 물리겠어 싶었지만.. 그게 정말 나일줄은 몰랐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몰렸던 폰페라다에서부터 베드버그를 옮아온 것 같았다. 순례길에서는 너무 많은 순례자들이 한 곳에 머무르기 때문에 숙소의 청결도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고 특히 산티아고 성당에 가까워지는 마지막 구간일 때는 순례자들이 더 많아져 베드버그에 물릴 가능성이 높다.
더 기분이 나빴던 점은 다른 스페인 친구들과 같은 숙소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물렸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다. 베드버그는 인종차별을 한다. 그것도 아시아인에게!
이 근거가 타당하다는 건 입증할 수 있다. 이전에 같이 걸었던 한국인 언니가 베드버그 퇴치제까지 준비해서 매일 뿌렸는데 결국 베드버그에 물렸고 이미 다른 지역에서도 한국인 순례자들이 많이 물린 걸 봤었다. 너무 억울하다. 믿기지 않는 이 사실에 나는 동네 약국을 찾아가서 베드버그에 물린 게 맞는지 확인 사살을 했다. 하지만 결국 물린 게 맞았고 크림을 처방받아 온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알게 되니 더 간지러운 느낌은 어쩔 수 없었고 미칠듯한 가려움은 잠까지 설치게 만들었다.
하루종일 팔과 다리를 긁어서 시뻘게진 채로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갔다. 메뉴가 5유로밖에 하지 않아 꽤나 좋은 구성이었고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스페인 친구들에게 와인을 쏘기도 했다. 저녁엔 가려움을 잊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바에 가서 갈리시아지방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뿔뽀(문어)도 먹었다. 뿔뽀는 삶은 문어에 파프리카 가루와 올리브오일 정도가 구성된 간단한 음식이긴 했지만 스페인에서 먹은 음식 중 역대급으로 맛있었다고 자부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게다가 오늘은 친구들이 소개해준 술과 커피가 섞인 까라히요라는것도 먹어보았지만 내 타입은 아니었고 두 번 다시 먹을 것 같진 않았다. 대신 샹그리아와 비슷한 띤또데 베라노를 추천받아서 마셔보았는데 레몬탄산수에 레드와인을 섞은 거라 달짝지근한 칵테일 같아서 아주 마실 만한 음료였다.
베드버그에 물린 잊지 못할 날이지만 결국 난 친구들과 저녁까지 술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몸은 가려워서 고통스러웠지만 맛있는 뿔뽀와 음식들로 오늘 하루를 이겨냈으니 그거면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