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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o Oct 08. 2023

걷는 것보다 메뉴선정이 더 어려워

2023 올레 

2023. 8. 3 (목)


어제이긴 하지만 올레길의 총 거리 중  200km를 돌파했다. 이제 제주의 남쪽을 거의 지나 서쪽으로 진입하는 구간이다. 날씨는 여전히 31도를 웃돌지만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 조금은 낫다는 생각도 했다. 게스트하우스 앞에 있는 테라스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밤새 소나기가 와있었는지 다 젖어있었다. 방 안에서 급하게 아침을 먹고 올레길을 시작했다. 어제 산 빵집에서 산 쑥팥빵은 팥이 아주 가득해서 배부를 정도였다. 이렇게 헤비 한 빵 먹고 출발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어제도 그렇고 계속되는 무더위 탓에 짝꿍도 나도 입맛이 별로 없어서 어제저녁은 마트에서 김밥을 사 먹기도 했다. 이제 점심메뉴나 저녁메뉴를 고르는 것도 살짝 지쳐가기 시작한다. 매일 너무 뜨거운 곳아래에 있으니 이제는 제주도에 있어서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지나 보다. 그래도 독일로 돌아가면 이 순간은 분명 그리워질 거다. 그러니 배가 터지도록 먹고 싶은 건 다 먹어야지. 


얼굴도 점점 새까맣게 타고 있다. 어제 거울을 보다가 코에 주근깨가 생긴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여름에 걸으니 어쩔 수 없는 거긴 하지만 애프터케어는 어찌해야 고민 중이다. 심지어 손도 결혼반지 덕분에 반지 자국 그대로 타버렸다. 제주도에서 자연반지 하나 만들어간다 치자. 10코스는 산방산을 살짝 겉돌며 시작되는데 보면서도 산방산의 위엄은 엄청났다. 만약 산방산이 올레코스에 있었다면 난 죽었겠다 싶었고 다행히 코스에 안 들어가는 것에 감사했다. 다만 산의 위상은 대단해서 걷는도 중 바다를 보다가도 다시금 산으로 시선이 갈 정도였다. 아무래도 산 옆이라 그런지 짝꿍은 또 한 번 고라니를 마주쳤는데 나를 부르는 순간 고라니는 사라졌다. 이제 고라니 정도는 무섭지도 않다. 


쭉 해안도로를 걷는 코스라 생각보다 쉬워서 걷는 데에 가속도가 붙었는데 너무 슬픈 건 해안가에 보이는 쓰레기의 양이었다. 너무 많이 보이는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부터 어업쓰레기까지. 언제 한번 날 잡고 싹 청소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이지 바닷가에서 술 마시고 쓰레기를 안 챙겨가는 많은 사람들 너무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에 이럴 수가 있나 싶고 내가 앞으로 어떤 걸 해야 할까 고민이 들게 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평생고민해야 되는 문제겠지만 나 스스로라도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해안도로를 다 걷다 보면 마라도를 갈 수 있는 여객선이 나오는데 보면서 언젠간 마라도를 꼭 가봐야지 욕심이 났다. 조금 더 가면 송악산이 나오는데 입구부터 바람이 엄청났다. 지도상으로는 송악산을 등산하지는 않지만 해안가를 따라가며 전망을 볼 수 있는 올레코스인데 아쉽게도 공사로 인해 출입이 안 돼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지 않고 직진으로 가게 된 터라 우린 약 3-40분 정도를 절약하긴 했지만 혹시나 놓쳤을 절경이 아쉽긴 했다. 조금만 가다 보면 다크투어리즘을 설명하는 표식을 발견하는데 그곳엔 최대의 양민이 학살된 섯알오름을 가볼 수 있다. 그곳에는 그분들을 기리는 추모비도 있고 가다 보면 알뜨리 비행장과 격납고까지 흔적이 다 남아있어 기분이 잠시 이상해졌다. 멋진 바다 풍경만 보는 게 올레길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유적지를 지나가며 볼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이렇게 올레길이 아니라면 잊힐 수 있는 역사를 사람들이 찾게 함으로써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알뜨르 비행장은 정말 넓디넓어 단 한그루의 나무도 없어 햇살을 머리 위로 관통하여 내리쬐었고 잠시나마 산티아고 때의 기분을 내주기도 했다. 건조하고 평평한 스페인 순례길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금 더 가다 보면 하모해변과 모슬포항이 나오는데 모슬포는 생각보다 도시라고 깜짝 놀랐다. 생각이상으로 일찍 도착한 우리는 이제는 밥도 국수도 지겹기 시작해서 샌드위치를 찾다가 결국엔 올레센터 옆에 있는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세트를 먹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 이 더운 여름날 보양식 겸 집 나간 입맛을 찾을 음식은 뭘까 고민이 된다. 


그리고 내일은 우리 둘의 11주년인데 친구를 만나기로 해서 대신 오늘 우리의 기념일을 축하하기로 했다. 뭘 잘 먹어야 모슬포에서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검색을 해야겠다. 우선 빨래도 하고 다이소도 가고 벌써 제주도에 2주나 있었는데 매일매일이 다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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