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올레
2023. 8. 1 (화)
8월의 시작이다. 공식적으로 난 오늘부터 무직이다. 7월 말까지 회사원이었으니 퇴사자의 첫날은 전 회사의 메일로 시작되었다. 분명 부탁한 서류를 pdf 버전으로 달라고 했건만 빨리 답장해 버렸다. 또 다른 충격적인 일은 화장실에서부터였다. 생리가 시작됐다. 나도 모르게 아침부터 소리를 질렀다. 생리를 시작할 기미는 보였는데 진짜라니. 안 그래도 31도가 되는 폭염에 지친 몸에 생리까지 겹치니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나 싶었다. 신은 뭐 하나 이 올레길을 평탄하게 완주하게는 못하게 하고 싶으셨던 걸까. 그나마 챙겨 왔던 탐폰들이 줄어드니 짐이 가벼워져서 좋아해야 되는 건가라는 광기의 긍정모드도 잠시 생겼었다.
아침엔 어제저녁부터 가볼까 했던 약천사를 지나가게 되었다. 역시 올레길은 제주 곳곳의 관광명소를 다 챙겨주는 느낌이라 따로 관광지를 찾아가지 않아도 알아서 데려가준다. 약천사를 지나고 나서는 주상절리 쪽을 가게 되었는데 공사를 하고 있어서 아쉽게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바다 풍경이 역시나 멋져서 그거면 됐지 싶었다. 중문단지를 바로 지나서는 베릿네 오름이 있는데 정말이지 올라가기 싫어 보이는 계단이 펼쳐진다.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게 제발 이 오름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되냐고 짝꿍에게 푸념했지만 정석인 이 친구는 그래도 코스를 따라가자며 날 부추겼고 어차피 올라갈 거란 걸 알지만 나도 한번 투정은 부리고 싶었다.
오름에 올라가니 바다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한라산 백롬담이 뚜렷이 보였다. 괜히 또 한라산 정기를 받으며 소원도 빌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어렴풋이 든 생각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것 같다. 오름에서 내려오고 나서는 리조트, 호텔등 내가 제주도에서 본 가장 관광지 같은 장소가 나왔다. 값비싼 리조트들 사이로 휴양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나는 지금 땀 뻘뻘 흘리면서 걷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도 든다. 내가 제주도 올레길 3주를 걷는 예산이면 사실 리조트에서 일주일은 지낼 텐데 하면서 후회 아닌 후회를 머릿속에서 열 번씩 할 쯤에는 이미 그 길을 지나와있었는데 마침 생리통 때문에 배도 점점 찌릿찌릿 아파왔다.
예민도가 최절정으로 다가와 얼굴을 찌푸리며 걷고 있을 때쯤 도로에서 우리와 나잇대가 비슷해 보이는 한 청년 아니 올레꾼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분은 우리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해 주고 '파이팅'을 아주 크게 외쳐주어 생리통에 아파하고 있는 나에게 엄청난 힘이 돼주었다. 그분의 여름도 우리처럼 아주 뜨겁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짝꿍이 우연찮게 백종원 파스타집을 발견해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웃긴 건 예전부터 유명했던 줄 서서 먹는 연돈이라는 식당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아 여기였어? 를 외치며 우린 주저 없이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심지어 어제 돈가스를 이미 먹었기 때문에 연돈에 줄 서서 먹는 건 포기. 올레길을 걸으면 사실 유명 맛집이 아니라 웨이팅 없고 싸고 에어컨만 빵빵하게 나온다면 만사 오케이다.
점심때부터 생리통이 점점 심해진 나는 약을 먹고 걷기 시작했고 아픔이 너무 심해서 거의 묵언수행을 하며 걸었다. 그래도 걸으면 정신이 걷는 데로 쏠려서 생리통에 신경을 안 쓴다는 게 좋긴 하지만 이 개고생을 내가 왜 하나 질문을 수백 번 던진다. 아니나 다를까 걷는 도중 나온 공원에서 아주 철부덕 제대로 넘어졌다. 경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다리에 힘이 점점 빠져 발이 돌사이의 공간에 걸렸고 가방으로 인해 무게중심이 흔들려 무릎과 팔이 땅에 닿으며 악 소리를 내고 넘어졌다. 다행히 바닥이 평평해서 다치진 않았으나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하고 돌기 시작했다. 지금 남은 구간은 약 10km인데.. 버스를 타면 10분일 텐데 당장 타자고 할까. 중간 스탬프도 찍었는데 어차피 내가 지금 버스를 타도 아무도 모를 텐데.. 서러움이 하늘을 찔렀다. 그래도 지금까지 걸어온 게 너무 아까워서 흙을 털고 다시 일어났다. 지겹다 지겨워. 다시 길을 나서고 있는 나 자신이 웃기긴 했다.
기다란 내천을 따라 걷다 보면 논짓물이 나오는데 가족들이 오기에 최적인 야외풀장이 있었다. 진짜 제주의 남쪽은 괜스레 모든 게 부러워 보이는 장소만 나온다. 애기들도 해수욕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진짜 다 벗어던지고 바닷속에 풍덩 빠지고 싶다. 제주도 왔는데 해수욕 한번 못하는 게 좀 아쉽긴 하다. 그 뒤로의 길은 수월하게 걷기 좋았지만 차가 많아서 은근 위험하기도 했다. 한국은 아무리 좁은 길이라도 차가 갈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가보는 듯하다. 괜히 19km가 아닌 건지 스탬프도 괜히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이때쯤이면 나올법한데 나오지 않아서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엔 아주 끝에서 스탬프를 발견했고 더불의 내일의 시작 코스 설명도 읽게 되었다. 내일 코스는 11.9km로 아주 짧지만 난이도 상에 해당한다. 또.. 난 산을 타야 하나 보다. 올레길은 정말 쉽지 않다. 게다가 다음 주까지 계속 30도로 비가 올 생각도 전혀 없나 보다. 이 최악의 컨디션을 우리는 잘 이겨낼 수 있을까. 시끄러운 클럽음악이 나오는 카페에서 오늘도 난 고민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