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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o Oct 05. 2023

얄팍한 감정

2012 까미노

2012. 8. 14 (화)


21일째 걷고 있는 중. 분명 작년에 국토대장정을 했을 때는 부산에서 서울까지라 딱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근데 일 년이 지나고 난 여전히 걷고 있다니 그리고 갈길이 아직 멀었다니.. 믿기지 않는 순간이다. 메세타 고원은 이제 끝이다. 황량한 사막 같은 곳을 지나 푸르디푸른 땅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의 고행의 순간들이 끝이 보이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제는 지나가며 만나는 순례자들과의 간단한 스몰톡도 당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제는 길에서 다른 한국인을 마주했는데 33살의 영어교사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깜깜한 새벽을 걸으며 왜 까미노를 걷는지 걸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수많은 사람들과 매번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눴지만 이 대화 주제는 질리지가 않는다. 


짝꿍과도 걸어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지만 오늘은 20km를 걷고 내일은 30km 걸어야 하는 일정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순간 짜증이 났다. 지난번에도 숙소로 인해 하루는 37km를 걷고 다음날엔 14km의 일정이라 한 번에 많이 걷는 거에 신물이 나있었다. 차라리 일정하게 25km씩 걷는 게 낫지 않을까. 왜 30km였다가 20km 인지 그냥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의 일정이 타이트해서 어쩔 수없기는 했지만 내가 이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게 나는 나의 까미노를 하고 있는데 왜 이런 일정에 따라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고 싶으면서 외롭지는 않고 싶고. 소속감을 느끼고 싶으면서 구속은 피하고 싶은 얄팍한 마음이었다.  이 친구와 같이 걷기로 정했으면서 이제는 이렇게 걷기 싫다고 말하는 나 자신을 보았다. 


서로 좋아서 같이 걸은 거면서 각자의 이해관계가 달라 걸을 때도 꿍해면서 걷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왜 이 친구는 나의 몸상태를 이해해주지는 못하는 걸까. 분명하고 솔직하게 나의 마음을 전달할 수 없어서 힘든 것도 있었다. 이게 국제 연애의 한계인 걸까.


이 친구는 자꾸 내 기분을 풀어주려 온갖 장난을 치는데 난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날 내버려 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자 이 친구는 길을 걷다 보이던 작은 열매를 따다가 내 눈앞에 가져왔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최선을 다해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듯해 보였다.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니 어이없이 웃음이 터졌다. 별것도 아닌 이유로 나를 좋아해 주는 이 친구를 매몰차게 대한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작정 걷기만 하는 단순한 까미노에서 이렇게 수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아직 철없는 내가 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느끼니 성장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웃음이 터진 우리는 별다를 일 없이 다시 걷기 시작해서 오늘의 숙소에 도착해서 지금은 쉬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너무너무 행복해서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그냥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사랑하고 있고 행복하다는 걸 자랑하고 싶다. 이런 게 정말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건지 신기하다. 이 감정이야 말로 까미노가 준 선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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