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
2012. 8. 24 (금)
어제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하여 우리는 불타는 밤을 보냈다. 짐을 풀고 나서 시내로 나와 보니 이미 산티아고는 순례자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이기에 한껏 파티 분위기였다. 길거리엔 포크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고 우리 모두는 이미 흥에 겨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두들 순례를 끝냈지만 여전히 돈이 없는 학생인 우리들은 1유로 타파스 1유로 맥주를 파는 술집 발견하여 진탕 마시고 놀기 시작했다.
멤버 중 스페인여자 두 명인 루씨아와 다씰은 나에게 " 꼭 다시 스페인으로 놀러 와. 이건 취해서 말하는 게 아니야. 정말 너랑 있던 시간들이 즐거웠어" 라며 말해주는데 너무 나도 감동이었다. 우리 여자 셋은 어깨동무를 하며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고 내가 모히토를 먹어본 적이 없다 하니 모두가 모히토를 외치며 칵테일을 먹으러 가자며 길을 휘저었다. 그렇게 우린 밤새 산티아고의 밤을 흠뻑 즐겼다.
다음날 아침인 오늘은 거의 아침 9시 반에 일어났다. 이렇게 새벽까지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꿈만 같았다. 나와 짝꿍은 거의 새벽 3시에 숙소에 들어갔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밤을 새웠다고 한다. 대단한 체력들이다. 점심은 스페인 친구들이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인 tortilla de patatas를 요리해 주기로 했다. 이 음식은 한국의 김치찌개처럼 흔한 음식이라고 한다. 스페인 친구들의 설명에 의하면 오랜만에 집에 가기 전 전화해서 "엄마! 또르띠야 빠따따 해줘!"라고 하면 어머니가 만들어놓은 다는 음식이라나. 재료도 감자와 양파 계란만 들어가서 간단하고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게 단점 이긴 하지만 꽤나 맛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왔지만 오후에는 해가 비쳐 짝꿍과 나는 산티아고 성당 바로 앞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성당 앞에 가만히 앉아 일기를 쓰기 시작하니 다시 잡생각이 휘몰아쳤다. 우리 둘은 순례길에서 만나 매일 같이 붙어 다녔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정작 우리 둘의 할 말은 이제 떨어져 가는 것 같은데. 지금은 당연히 좋고 행복한데 이 친구는 나중에 나를 질려하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이제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도통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연인이나 마친 가지인데 지금 내가 어떤 말을 해버리면 돌이킬 수 없고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 같아 말도 못 꺼냈다.
이런 나의 폭풍 고민 속에서도 이 친구는 성당 앞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뭔가 괘씸했다. 그래 유럽에서는 연인이 오늘부터 1일! 사귀자!라는 말은 안 한다고는 했지만 난 여전히 우리의 관계를 정립하고 싶었다. 왜냐 그렇지 않으면 우린 이 스페인 순례길이 끝나면 헤어져야 했고 우리의 추억들도 한여름의 꿈으로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왜인지 꿈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성당에서 한 고민을 털어놓아야 했다.
"나.. 혹시 너의 여자친구니?"
갑자기 머리를 짚으며 이 친구는 엄청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었다. 대답을 하지 않고 갑자기 불현듯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나에게 말했다.
"와! 나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다니! "
황당했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 난 고민을 백번한동안 이 친구는 우리 사이를 한 번도 의심한 적도 없고 오히려 내가 우리의 관계를 정해준 것 같아 신나는 눈치였다. 그리고 우린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둘 다 너무 사랑하는 건 알았지만 차마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었다. 내 생에 있어서 이렇게 기침이 나올 듯 참을 수 없어서 나온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만 본채 걸었던 나날들을 뒤로하고 우린 우리의 연애를 산티아고에서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우린 약속했다. 나는 스페인에서 독일로 돌아가고 짝꿍은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돌아가도 연애를 계속하기로.
우린 서로의 약속을 품에 앉고 기분 좋게 친구들의 숙소로 향했다. 저녁은 이탈리안 친구인 레레 담당이었다. 레레는 내가 한국인 멤버들과 파스타를 요리할 때마다 옆에 와서 한 마디씩 거들고 참견하던 친구였다. 매번 알짱대면서 "얘들아.. 스파게티는 이렇게 하는 거야." " 얘들아 너네가 파스타를 만들다니 이탈리아사람으로서 뿌듯하다" 등등.. 이탈리아인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하도 파스타의 정석을 얘기하니 우린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해서 드디어 오늘 저녁 솜씨를 뽐내기로 했다. 나름 레레가 재료를 직접 사와 음식을 만들어줬는데 정말이지... 너무... 맛있었다. 이 친구가 이탈리아 사람인 걸 인정해야만 했다. 뭐라 표현할 수없을 만큼 차원이 다른 파스타였다. 그동안 그가 말해왔던 허세와 참견을 나는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그렇게 화룡점정인 파스타를 먹고 헤어졌다. 레레, 루시아, 다씰, 짝꿍, 그리고 나.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를 가족같이 생각해 줬던 우리 멤버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 휴식은 끝이다.
모두가 산티아고에서 끝을 맺었지만 짝꿍과 나는 또 바다를 보러 90km를 마저 걸어야 한다. 앞으로 남은 3일 잘 걸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