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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o Oct 11. 2023

행복한 기억만 가득 채울꺼야

2023 올레 

2012. 8. 7 (월)


막바지가 다가온다. 벌써 아쉽네. 올레길을 걷는 동안 최초로 아침 7시도 되지 않아 행군을 시작했다. 보통은 7시 반에서 8시 사이인데 둘 다 아침도 후루룩 먹고 길을 나섰다. 짐 싸는 시간도 그렇고 이젠 올레길에 프로페셔널해지는 기분이다. 숙소를 나와 스탬프를 찍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유심히 우릴 지켜보셨다. 아무래도 우리의 조합과 품새는 궁금증을 유발하나 보다.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저지에서 해안가로 가는 길은 내륙이기도 하고 편의점, 슈퍼 하나도 없기에 쉬지 않고 해변가까지는 군말 없이 가야 하는 코스였다. 그래도 좋았던 점은 걷는 길이 나름 순탄하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꽤 걸을만했다는 거다. 이렇게 쉴 장소도 없는 숲길, 마을길은 왠지 모르게 생각도 많아진다. 


올레길 초반에는 나의 미래 걱정들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면 후반기에 들어서니 왠지 모르게 고마운 사람들, 친구들이 길 위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닌가 보다. 외로운 올레길을 걸으면서도 생각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육지로 돌아가면 연락해야지 다짐하게 된다. 짝꿍은 점점 더 거미줄 헌터가 되어가고 있다. 숲길에 너무 다양한 거미줄이 많은데 미리 발견하고 앞서가서 끊어주는데 이젠 전문가가 됐다. 오늘도 고라니 한 마리는 기본적으로 마주치고 뱀도 오랜만에 마주쳤지만 둘 다 그리 놀라진 않았다. 이 정도면 우리 둘 다 자연인이 돼 가는 건 아닐까. 


계속 걸어가다 보니 우린 월령리에 도착했고 우선 마을이 보이고 사람이 보인다는 점에서 행복했다. 내륙에서 바다를 볼 때의 쾌감은 은근 짜릿하다. 저 멀리 슈퍼가 있겠지 하는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오아시스 같은 슈퍼에서 음료수를 사 먹고 노래도 흥얼거리며 걸었다. 문제는 우리 둘 다 더위와 피곤함의 결합으로 자주 길을 잃는다는 거다. 몇 번이나 정신 차리자고 다짐했지만 한 번은 본능적으로 큰길을 간다던가 한 번은 땅만 보고 걷다가 대놓고 있는 싸인을 놓친다던가 하는 경우였다. 마지막까지 정신 놓지 말고 걷자고 다짐했다. 


그래 우리가 길을 자꾸 잃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아름다움이다. 금녕해변은 가족과 아기들이 가득했는데 바다가 너무 깨끗했다. 이어서 나온 협재해수욕장도 사람도 많고 바다도 이쁘고 왜 이 해변 두 개가 유독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당장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데 못 그러는 게 아직도 아쉽다. 돌아가기 전에 발은 담가볼 수 있으려나. 점점 배도 고프고 뭔가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우리는 식당을 찾다 올레길 중간에 덮밥집을 찾았다. 골목골목에 귀여운 식당과 카페가 많아서 혹하고 있는 찰나였는데 월요일 휴무가 많아 아쉬웠지만 우리가 간 덮밥집은 아주머니가 친절하시고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이제 서쪽이 아닌 거의 북쪽해안으로 올라오고 있는 우리는 맨 처음 올레길의 시작이 생각났다. 바다와 소소한 마을이 있지만 또 동시에 조용했던 곳. 협재는 그래도 더 관광객이 많은 듯하고 짝꿍은 제주도의 첫 기억 때문인지 북쪽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혼자 여행 왔을 때의 기억 때문에 동쪽의 제주를 좋아하는 것처럼. 


어디서 봤던 영상이 기억난다. 힘든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을 컵에서 하나하나 건져내느라 힘들어하지 말고 더 좋은 기억을 넘치게 부어서 힘든 기억이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오늘도 마지막 순간까지 넘치게 좋은 기억들을 제주도에서 만들어 채워나갈 것이다. 


도착하기도 전에 카페에서 일기를 쓰는 건 처음이다. 숙소 주변에 괜찮은 카페가 없어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스탬프를 찍으러 갈 거다. 이제 오늘이 가면 3일만 남았다. 어떡하지. 벌써 슬프다. 가지 마라 제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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