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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o Oct 16. 2023

올레꾼의 여름나기

2023 올레 

2023. 8. 8 (화)


오늘은 신기하게도 역대급으로 쉬운 올레길이었다. 거리도 물론 짧은 편에 속하지만 11km 걸을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아침은 어제 사놓은 파운드케이크와 숙소에 있던 커피, 한라봉주스로 시작했는데 파운드케이크가 너무 맛있고 헤비 해서 생각이상으로 든든했다. 나중에 또 가면 종류별로 다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며 짐쌀 채비도 했다. 어제 빨래방에서 빨래를 다해버려서 모든 옷들이 아주 산뜻하고 깔끔하다. 숙소에 사는 고양이 중 한 마리는 어제 인사를 나눴는데 오늘 아침에도 만나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고양이가 너무 졸려해서 잘 자라고 말해주고 길을 나섰다. 


산 헤이터인 나는 15코스의 A구간 B구간 중에서 당연코 더 B 코스를 택했다. 쉽기도 할뿐더러 최근 내륙을 계속 걷나 보니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초반엔 더 긴 길을 항상 택하던 짝꿍도 이젠 지쳤는지 나의 선택에 별다른 코멘트를 남기진 않았다. 한림항은 내가 제주도에서 본 가장 배가 많은 곳 같았다. 아침이라 몇몇 배는 불도 켜져 있고 걷기에 딱 좋은 어두운 하늘과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게 실감이 안 난다. 이제 그만 걷고 싶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이렇게 즐겼던 순간은 지금뿐인 것 같다. 시간이 흐르는 게 무서웠다. 


우리는 귀덕 쪽에 진입하기 시작했는데 상점들과 사람들도 점점 보이는듯했다. 곽지 해변도 지나가다 보았는데 수심도 깊어 보이고 아침이라 아직 사람이 없어 조용한 해변은 멍 때리고 보는 맛이 있었다. 그리도 드디어 곽지해변에 도착하기 전 드디어 나는 발을 물에 담가보는 기적을 체험했다. 올레길을 걸으며 수없이 보았던 계곡과 바닷물들을 지나치며 매번 투덜댔는데 어제 카페 앞에서 바닷물을 손에 살짝 적셔보니 너무 뜨거웠다. 내가 원한 건 차디 차가운 냇물이었던 것이다. 그때 마친 지나가던 길에 용천수가 있었다. 심지어 앉아서 발 담그기에도 너무나 퍼펙트한 공간이었다. 옆에서 짝꿍도 지금이라며 바람을 넣었고 난 이 차가운 용천수를 찐으로 경험하고 싶었다. 결국 마음을 다잡고 양말을 벗어 두 다리를 넣는 순간 머리까지 찡해지는 차가움이 온몸을 감쌌다. 이거다 이거. 다리가 얼어버릴 것 같은 차가움 이걸 내가 원했던 거다. 




19일이나 걸었지만 내가 잠깐 발은 담근 용천수 한 번으로 모든 피로가 싹 가시는듯했다. 겨우 10분 정도긴 했지만 발을 수건으로 닦고 양말을 신어도 한동안 차가운 물의 짜릿함을 저릿하게 느끼며 걸었다. 깔끔쟁이 짝꿍은 끝까지 물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난 다시 용천수를 맞이한다면 언제든 내 두발을 바칠 것이다. 

나의 최고 여름 피서는 용천수 10분! 그거면 충분했다. 


나머지 걷는 길에도 짝꿍에게 얼마나 시원하고 짜릿했는지를 연설하며 가다가 맛있어 보이는 빵집이 있길래 잠깐 빵도 하나 사 먹으며 쉬기도 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수월하구나 싶었다. 거리가 짧은 만큼 급하게 가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도 이젠 생겼다. 애월에 진입하면서는 카페도 점점 많아지고 관광객 무리와 차도 많아졌다. 몇 년 전 관광객이던 나도 봤었던 애월을 이렇게 가방 메고 걸으러 오다니 새삼스럽다. 

당시엔 예쁜 카페, 인생샷 찍으러 제주도에 왔던 나인데 같은 인생샷 스폿에서 땀을 흘리고 걷고 있을 줄 누가 알았나. 

카페도 정말 많았다. 물론 다른 곳이나 제주도 전체가 카페가 있는 건 당연하긴 하지만 5분만 걸어가도 카페로 뒤덮여있는 느낌이었다. 고내포구에 도착을 한 것도 이른 11시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남기는 처음이다. 물론 일찍 출발하긴 했지만 길이 워낙 쉬워서 더 탄력 받은 것 같은데 혹시라도 짧고 편한 길이 어떤 코스냐고 물어본다면 한림-고내 15 B 코스는 당당히 추천하고 싶다. 대신 이 코스가 올레길을 흠뻑 담고 있다고는 말 못 하겠다. 제대로 된 올레길은 내 느낌에 다른 곳이 훨씬 더 좋다. 


고내포구에 와서는 바로 점심을 먹기로 하고 김밥과 해물라면을 먹었다. 하도 유명한 집이라 이른 시간에도 사람이 많았는데 다 먹고 나갈 때는 사장님께서 파이팅이라며 응원해 주셨다. 이젠 이 응원마저 그리울 것 같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올레센터에 들렸는데 역시나 그곳에 있던 분도 우리를 알고 계셨다. 우리 진짜 셀럽이다 셀럽.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매번 우리의 사진도 찍어주시니 황송하고 이것마저 추억일 것 같다. 


아직도 게스트하우스 체크인 시간이 많이 남아 근처 카페에 가있기로 했다. 가옥을 개조해 만든 카페라 조용하고 아늑해서 좋다. 문제는 이걸 쓰고 있는 동안 내가 커피를 쏟았다. 이제 정신력이 딸리는 것이 틀림없다. 심지어 한입 먹은 아메리카노를 쏟은 데다가 컵도 깨뜨려서 너무 죄송해 커피랑 디저트를 더 시켰다. 


이제는 올레길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잘 걸어야지! 유종의 미를 보여야지! 컵을 깨뜨린 순간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느껴 다시 기강을 잡아본다. 태풍 카눈의 영향 때문에 내일과 내일모레는 비가 온다는데 걱정이다. 다행인 건 한동안 더웠던 지난날에 오는 비라서 좋아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다치지 말고 무사하게만 완주하자!  화요일이라 이 동네에 가보고 싶었던 동네서점은 아쉽게도 휴무일이라 한다. 올레길 마지막엔 좋아하는 책도 꼭 사서 들고 가고 싶다. 가방 무거워질까 봐 사지 못했던 것들도 다 들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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