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올레
2023. 8. 25 (토)
다시 걷기 시작한 첫날.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을 보고 순례를 끝내거나 혹은 버스를 타고 피니에스테라를 간다. 사실 나도 버스를 타고 가려고 했다. 도무지 내 체력이 해낼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피니에스테라를 걸어서 가기로 한 이유는 특별하진 않다. 주변의 모든 순례자들이 나에게 추천했기 때문이다.
"너 피니에스테라 갈 거야?"
"아니.. 힘들어서 그냥 버스 타고 갈려고 하는데?"
"피니에스테라는 걸어가야지!! 그게 진정한 순례자야!
그리고 피니에스테라 가는 길이 정말 예쁘데~"
다시 걸을 땐 나에게 추천해 줬던 모든 순례자들을 욕하기도 했다. 길이 예쁜긴 개뿔. 모든 사람들에게 단체로 속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 후회는 오래가지 않았지만.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겨우 하루만 더 쉬고 출발하는데 정말이지 힘들었다. 한 달이나 걸었는데 쉬었던 시간은 겨우 하루라니. 지금 생각하면 미친 일정 같다. 그래도 오늘 포함 이제 3일만 더 걸으면 진짜 끝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걷는 건 벅차다. 매일 걷는 건 생각만 해도 길다고 느껴지지만 이제 3일은 정말 짧은 시간이다. 산티아고 성당을 지나 끝난 줄만 알았던 표지판을 찾아 다시 걸어갔고 산도 넘어 조금만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이 길을 지나게 되며 확실히 느낀 게 있었다.
첫째, 피니에스테라 향하는 길은 쉴 공간이 적다. 산티아고 길은 아무래도 바나 레스토랑 등이 많아서 쉬어갈 수 있지만 숲길로 이뤄져있는터라 쉬기가 애매하다.
둘째, 길 위에 순례자들이 많이 없다. 사람들을 만나며 인사하고 떠드는 나름의 재미가 있는 산티아고라면 이미 산티아고 성당에서 모든 길을 끝내고 버스로 가기 때문에 조용하다.
셋째, 혼자 걷는다는 부담감이 있다. 순례자들이 없는 만큼 길도 혼자 찾아야 하고 게임의 메인 미션을 끝내고 혼자서 확장판을 체험하는 느낌이랄까.
더불어 생각해 보면 짝꿍과 나 둘이서 걷는 건 처음이다. 처음엔 결국 같이 걷던 한국언니가 있었고 그 뒤로 스페인친구와 이탈리아친구까지.. 우린 항상 사람들과 걸어왔던지라 단체 생활이 익숙한 우리였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달랐다. 우린 산티아고 이후로 이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널 좋아해 가 아닌 I love you를 듣게 되니 이 말 한마디가 소름 돋고 짜릿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구나. 이건 가능한 거구나.
오늘의 마을인 Negreira에 도착해서 저녁을 만드려고 하는데 냄비가 없어서 쓸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가 한 여자를 만났다. 그분 얼굴이 만신창이어서 물어보았더니 베드버그에 물린 거란다. 안타깝다. 나도 베드버그에 또 물렸는데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니. 우린 서로를 불쌍해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 친구도 까미노에서 연인을 만나게 된 케이스였다! 바로 헝가리 남자와 영국여자. 그 커플 또한 우리를 보면서 까미노에서 만난 게 아닐까 추측했단다. 역시 숨길 수 없나. 서로가 서로를 자연스레 알아본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까미노는 참 신기한 곳이다. 이곳에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지 않는구나.
이 길에는 , 이 세상엔 기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