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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o Oct 10. 2023

가장 덥지만 가장 따스했던 날

2023 올레 

2023. 8. 6 (일)


어제저녁 편의점에서 사놓은 빵과 삼각김밥, 커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래도 스탬프 가까이에 편의점이 있어서 얼음물도 사고 시작은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깊은 내륙으로 다시 향해가는 코스라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긴 했다만 그래도 제주도의 더위는 여전히 미칠 지경이었다. 길이 힘들지 않아도 3주 차가 다가오니 체력이 수시로 바닥나서 쉬어야 하는 장소가 필요했지만 이 더운 여름에는 그게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 정말 깊은 시골마을만 계속 지나가다 보니 밭만 보이고 도저히 10초도 쉴 공간이 없어 이러다가는 쓰러지겠다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끔 마주치던 카페도 있었지만 보통 10시 11시에나 돼서야 카페가 문을 열기에 기다려서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특히 일분일초가 아까운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의 휴식공간이 필요했는데 13코스에는 정말이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로맨틱한 허니문이 이렇게 하드 하게 느껴져서야..


용수저수지를 지나고 나서도 끝도 없는 밭 -숲길- 밭- 잠시 마을 정도의 풍경만 보였다. 정말이지 고행의 길이었다. 물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잠시 마을의 팽나무 아래에서 쉬기도 했지만 물도 없으니 지나가시는 할머님께 한잔만 달라고 할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고사리 숲길을 시작할 때는 목이 바싹바싹 말라왔고 조금만 걷다 보면 엄청 커다란 의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의자마을이었다. 이런 신기한 동네가 있네 싶다가도 너무 지쳐있던 스탬프부터 찍자하고 갔더니 한 누렁이가 우리 주위를 서성였다. 다친데도 없고 목줄도 없는 그냥 동네 강아지 같긴 한데 우리에게 간식을 얻어먹고 싶었던 건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차가 오는데도 느릿느릿 비키고 있어서 깜짝 놀랐는데 제발 유기견이 아니고 동네 산책하는 강아지였으면 좋겠다.


스탬프를 지나면 의자공원이 살짝 보이지만 빨리 쉴 곳을 찾아 떠나고 싶어 황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왜냐 우리 코스의 정점은 저지오름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왔던 저지오름은 친구와 차를 타고 와서 좋은 기억과 아름다운 기억이 가득했던 때라 다시 저지오름을 갈 생각에 살짝 설레었는데 걷다 보니 이거 내가 간 코스가 아닌듯했다. 내가 기억했던 저지오름과 나의 길을 확연히 다른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으며 끝도 없는 계단과 오르막길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때 알게 되었다. 지도를 보니 저지오름의 둘레길로 가고 있었고 아쉽게도 분화구를 보진 못했다. 내가 몇 년 전 같던 길은 유명한 관광코 스였던 것이다. 역시 제주 올레길을 모두가 가는 흔한 길은 보여주지 않는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아. 그래도 저지오름은 오늘 코스의 끝을 향해 간다는 사실이라 그것 하나만으로도 오늘을 기쁘게 해 주었다. 


정말이지 오늘은 올레 코스 중 무난한 길이었지만 우리가 가장 힘들어했던 코스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저지오름 아래 정자에서 큰 숨을 내쉬다가 스탬프를 찍기 전 밥을 먼저 먹기로 했다. 점찍어뒀던 김밥집으로 가자고 얘기했지만 일요일이 하필 휴무일이었다. 김밥에 떡볶이를 너무 먹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반대편에 잇던 국숫집에 콩국수 개시라는 사인을 보고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이번 여름 못 먹어서 마침 아쉽다 생각했는데 제주도에서 먹는구나. 심지어 콩국수는 살짝 검은콩이 들어가 더욱 고소했다. 얼음도 동동 띄워주시고 역시 이래서 여름은 콩국수였나 보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올레센터로 갔는데 거기에 계셨던 분께서 아까 뵀던 분들이라며 길에서 마주쳤던걸 기억하시고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곳에서도 우리의 존재가 발각되어 이미 소문이 났던 상황이었다! 바로 독일에 사시는 스페인남자와 한국여자 맞으시죠?라고 물어보셨고 우리가 이렇게 얘기가 돌만큼 작은 제주의 셀럽이 되어있었을 줄이야 부끄럽기도 하면서 그 상황이 웃겼다. 이제 올레길은 겨우 4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우리의 여정이 끝까지 안전하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빨리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에 펜션에 갔지만 아직 체크인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카페를 우선 가기로 했다. 슬픈 건 우리가 찾은 카페하나는 문을 오늘 열지 않은 것 같았고 나머지 하나는 찾아가기까지 했으나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제주도의 힘든 점은 예상치 못한 휴무와 폐업 그리고 그 휴무 또한 인스타공지를 한다는 것이고 아니면 대부분 예약제라는 것이다. 뚜벅이인 우리는 이런 실상에 아주 취약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제는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한 곳이 하나 있어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카카오맵이 알려주는 대로 갔더니 남의 농장까지 가로질러가야 하는 길이 나와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도 제발.. 제발 이 카페는 열려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왔는데 너무 다행히 열려있었고 사장님과 까만 강아지 마루도 우릴 반겨주었다. 카페는 특이한 구조에 드립커피도 팔고 벽 전체에 손님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너무나도 따뜻한 분위기를 준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강아지 마루는 나와의 셀카는 거부했지만 우리가 먹는 쿠키에는 관심을 가득 줬고 침도 한 바가지 흘렸다. 정말 정말 지쳤던 우리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곳이었다. 조금 있다가는 가고 싶었던 바로 옆의 서점에도 들릴 것이다. 


제일 힘든 날이긴 했지만 제일 좋은 쉼을 벌써 한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한 여름이지만 따스한 캐럴재즈가 카페에 흘러나온다. 너무 더운 날씨이지만 이곳은 너무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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