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
2012. 8. 27 (월)
순례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33일째 걷는 날. 아침에 일어나서 바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상쾌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우린 마지막날 마저 길을 잃었다. 그것도 다른 순례자 2명이 길을 되돌아오는 걸 발견해서 알아챈 거다. 여전히 재밌는 까미노다. 마지막날이니만큼 날씨가 좋기를 기대했었다. 특히 갈리시아지방은 바다가와 가까워서 비가 자주 온다고 들었는데 내 바람과 달리 날씨는 걷는 내내 좋아졌다 흐려졌다를 반복했다.
코스의 중간쯤엔 산을 점점 올라가는 길이 나왔고 그 정상에서 마침내 저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청량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독일에 1년간 살면서 바다 한번 보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새파란 바다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 산티아고를 걸어오며 시골 마을들과 메세타고원, 들판들만 봐서 그런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방도 무겁지 않고 날아다닐 것 같았다. 내가 버스를 탔다면 이런 기쁨과 이 순간도 누리지 못했겠지.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우린 피니스테라에 도착 전인 마을 Cee에 도착했다. 해변이 너무 멋진 아름다운 바다 마을이었다. 바닷물은 햇살에 비쳐 반짝거리고 배들은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이런 곳에 한 번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연신 감동하며 사진을 찍고 감탄하고 있는 반면 짝꿍은 체력에 한계에 맞서고 있었다. 이 친구답지 않게 짜증도 내기 시작하고 피로해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순간에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곧이어 내 체력도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마지막을 향해서.
내 신발과 양말은 이제 구멍이 나있었다. 도착하기 전 마을에서 훈장과도 같은 베드버드 물린 다리와 신발을 찍어본다. 다시 봐도 처참한 순례자의 다리이다.
결국 우린 피니에스테라에 도착해서 우선 숙소에 짐을 놓았다. 이미 산티아고콤포스텔라에서 공식 완주증을 받긴 했지만 피니에스테라의 공식 알베르게에서도 완주증을 발급해 준다. 물론 이 여정의 끝은 아니었다. 공식 알베르게에서 약 5킬로 정도를 더 걸어야 등대가 나오고 0km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우린 짐을 풀고 점심을 만들어 먹은 다음 다시 걸어야 했다.
이젠 무겁게 들고 있었던 가방도 없이 맨몸으로 마지막 5km를 걸어야 하는 상황. 바닷가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걷는데 꽤나 긴 거리였다. 그때만 해도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떠나 우리 둘 다 체력은 정말 바닥나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낭만도 없고 말도 없이 걷고 있으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도 오기 시작했다. 나의 환상은 점점 더 파괴되고 있었다. 내가 분명 기억하던 다큐멘터리 속의 모습과는 달랐다. 맑은 하늘에 다른 순례자들처럼 옷을 태우는 모습을 기억했는데 역시 난 TV의 주인공은 아닌가. 비가 내리는 피니에스테라는 이곳의 보통날이지만 괜히 나에게만은 특별한 날이 되길 바랐나 보다.
그렇게 우린 세상의 끝인 0km 라 적혀 있는 피니에스테라에 도착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정말 세상의 끝이다. 정말 끝이다. 나는 어떻게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걸어온 우리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비를 피해 처마 밑에서 맥주를 마셨다.
걷고 나서 마시는 맥주는 알싸하고 시원했다. 그리고 비가 오는 피니에스테라에서 맥주와 함께 마지막 일기를 썼다.
나의 까미노는 이렇게 끝이 났다. 여기까지 왔어도 수많은 고민을 안고 있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안개 끼고 비 오는 피니에스테라처럼. 걷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이 될 줄 알았다. 나의 고민도 생각도 정리가 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래도 많은 걸 얻었다. 소중한 추억과 사람들, 그리고 잊지 못한 아름다운 풍경들.
그리고 열심히 걸어가면 끝이 보인다는 것.
내 마음속의 화살표를 따라가면 언젠가 마을에 도착할 거라는 것.
힘든 산을 넘으면 파란 바다가 보인다는 것.
33일 동안 854km를 걷고 내가 얻어낸 것들이다.
앞으로도 이때의 순간들을 되새기며 살 것이다. 나의 순례길은 평생 계속될 것이다. 때로는 길을 헤매고 울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올 테고 어떤 순간은 행복하겠지.
대신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것이다.
23살의 여름, 난 지금 세상 끝에 있다.
우리 모두 이 길을 걸어내 보자. 부엔 까미노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