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올레
2023. 8. 10 (목)
이 일기의 마지막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잘 나오지 않던 펜도 말도 안 되게 잘 나오기 시작한다. 어제 주녁부터 태풍 카눈이 북상하다고는 했지만 저녁 내내 비는 안 오나 아침에도 날씨는 어떻게 될까 계속해서 체크했다. 마지막 날에 차질이 있을 순 없었다. 특히 올해 장마에 많은 사고가 있었던 터라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는 여론도 많고 주변에서도 메시지로 조심하라고 연락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아 더더욱 나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우선 아침에 비는 오지 않았고 가방커버를 씌우고 출발했다. 언제든 비가 떨어진다면 대비할 수 있게 우비도 배낭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17코스의 시작은 무수천과 함께한다. 무수천은 걱정 근심을 다 가져가 주는 제주도의 중요한 천이라고 쓰여있었는데 걷는 중간에는 길 옆 돌판에 몽글몽글한 문구들이 써져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았던 건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 모두 과거가 될 것이라는 것. 이 소중한 순간들도 과거가 될 테지만 올레길의 좋은 기억만으로도 난 몇 년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무수천은 우리의 고민을 그렇게 무심히 들어준 것 같다. 무수천은 생각보다 크고 엄청 길었다. 특히 밤새 내린 비 덕분에 물살도 엄청났는데 걸으면서도 물의 양을 보며 아찔해했다.
무수천을 계속 따라가면 길이 바닷 쪽으로 이어지는데 중간에 한 표지판을 마주쳤다. 비가 올 시에는 우회하라는 표지판이었고 우선 비가 오지 않으니 가보자 했으나 도착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아마 광령천이었을 텐데 다리 없이 돌 만 있는 곳을 퐁당퐁당 가로질러 가야 하는 것이었다. 이미 태풍 때문에 범람하기 직전인 천을 보고 우린 어쩔 수 없이 우회해야 했고 그게 우회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에도 우린 해안가를 걸으며 바람과 싸우면서 한 발짝 나아갔지만 이호태우 해변을 마주쳤을 때 일부도로는 이미 통제가 되고 있었다. 그 유명한 해변을 이렇게 거칠고 사나운 태풍 속에서 마주하다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비가 오진 않았고 하늘을 보니 태풍구름이 점점 움직이는 게 보이긴 했으나 우선 통제된 올레길을 뚫고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 우회하는 거 가장 안전하게 가자는 마음으로 최대한 큰길을 택해 걸었고 중간에 편의점도 들려 요기도 했다. 우회를 하면 기존 19km 보다 더 걸는 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조금 지나서 우린 다시 원래의 길을 찾아냈고 해변을 걷다 도두봉에 도착했다. 올래 여정의 마지막 봉! 그래도 높지 않은 산이니 안심은 했지만 인고의 마음으로 한 계단 씩 올라갔다. 이런 나의 챌린지를 즐거워하며 짝꿍은 나의 마지막 등반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오르고 나서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 아무래도 공항옆의 봉이다 보니 관광객도 은근히 많았고 제주시의 전체경관을 보기에 딱이었다. 특히 제주공항 바로 옆이라 비행기가 랜딩 하는 것도 보이니 신기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태풍 때문에 다 결항이었는데 이제 다시 뜨나 보다.
도두봉에서 내려오면 무지개 해안도로도 나오는데 역시나 관광지다. 나도 마침 몇 년 전 이곳에서 사진도 찍고 카페도 갔었는데 그 카페는 이제 사라지고 기념품 상점이 되었다. 친구와의 기억이 사라진 것 같아 잠시 씁쓸했지만 갈길이 멀었다. 가는 내내 옛 기억을 되감으면서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도 멍 때리고 쳐다봤다. 이렇게 크고 선명하게 도착하는 장면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저 멀리 파란 하늘에서부터 다가오는 비행기를 보자니 괜히 속도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점점 걸어가면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큰 건물들과 아파트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제주도 땅인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건 뭘까.
용두암에 도착해서도 관광지의 느낌을 물씬 받았는데 내가 용두암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게 해주는 돌이라고 표지판을 보고 얘기하니 짝꿍은 다짜고짜 간판에다 대고 벌써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어떤 소원을 빌었냐고 하니 ' 점심 먹을 식당에 웨이팅 없게 해 주세요' 란다. 참 소박하다 이 남자.
나는 돈 왕창 벌게 해 주세요였는데 쩝.
용두암을 본다는 건 우리의 길이 곧 끝나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조금만 돌아가면 다시 시내로 진입하는 코스인걸 알기에 살짝 울컥하기 시작했다. 끝을 아는 건 미래를 아는 건 이래서 슬프다. 너무 아쉬우니 밥을 먹고 가기로 결정했다. 짝꿍의 소원처럼 우리가 갔던 식당에 웨이팅이 없고 자리가 바로 있었다. 나는 청귤소바를 시켰고 짝꿍은 고등어 덮밥을 시켰는데 먹자마자 짝꿍은 아! 너무 맛있다며 감탄했다. 보통 한입을 먹고 이러진 않는데 도대체 뭔가 싶어 한입 먹어봤는데 아... 정말 맛있었다. 고등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소바를 시킨 것이었는데 소바도 맛있지만 고등어 덮밥이 충격적으로 맛있어서 살짝 후회도 했다. 염치 불고하고 너무 미안하지만 한 입만 더 달라고 해서 먹기도 했고 밥 한알이 아까울 정도였다. 내가 소바를 다 먹어 갈 때쯤 짝꿍은 갑자기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할 수 있다며 내 앞에 마지막 밥 한 숟갈과 고등어 조각을 내밀었다. 식탐이 있는 이 친구가 마지막 한입을 준다는 건 진짜 사랑 맞았다. 그래서 나도 그의 사랑을 한 움큼 입에 가득 넣고 음미했다.
올레길의 마지막 점심을 먹고 도심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고 햇빛은 점점 더 쨍쨍해졌다. 다시 들어온 도심이라 리본과 싸인도 잘 보이지 않았으나 다 온마당에 길을 잃을 순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흥분을 안고 길을 천천히 찾아갔다. 관덕정 입구를 도착할 때쯤에는 정확히 3주 전 우리가 버스를 타고 온 정류장도 보이니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찬찬히 계속 길을 찾아 나섰다. 마침에 우리의 간세 스탬프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3주간의 여정이 저만치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 자리 그대로에서..
첫날 바보처럼 17코스 스탬프를 찍은 터라 기념으로 한번 더 찍었다. 우리 둘 다 눈물이 나오진 않았지만 얼싸안고 우리 둘의 순간을 기념했다. 우리가 원했던 신혼여행이 드디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진짜 해냈다는 성취감과 이젠 더 이상 안 걸어도 된다는 기쁨과 오묘한 감정이 뒤섞였다. 내일도 자동으로 아침 6시에 눈이 떠지겠지만 남편의 품 안에서 조금 더 잘 수 있을 것이다.
우린 관덕정 분식 안에 들어가서 자축 맥주를 시키고 이 여정을 곱씹었다. 맥주를 한입 마시는 순간 캬.. 까미노 때 0km 표지판이 있던 피니에스테라에서 마시던 맥주도 생각나고 지금 마시던 제주 맥주도 동시에 입안에서 스쳐갔다. 정말 걷고 나서 마시는 맥주가 제일이다. 그래도 이 일 기장은 고요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언제든 내가 꺼내보면서 곱씹어 줄 것이다. 우리의 여름방항은 이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