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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o Oct 16. 2023

올레길 끝에 만난 태풍

2023 올레 

2023. 8. 9 (수)


D-2  태풍 카눈이 온다는 소식에 아침부터 바짝 긴장했다. 이틀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그냥 비도 아니고 태풍이 온다고 하니 아침부터 엄마한테도 연락이 왔다. 주변에서도 걱정해 주는 메시지가 많아 정신 차리고 걸어야지 마음을 다잡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은 까맣고 바람이 부는듯했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나섰는데 비는 다행히 오지 않아 서둘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오늘의 코스는 반은 해안가이고 반은 내륙이라 비가 올째쯤엔 바닷가를 걷지 않으니 조금 희망을 가져볼 만했다. 해안가를 걸을 때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시원하긴 했지만 나중엔 무서울 정도로 많이 불어 음산한 소리까지 나기 시작했고 파도가 미친 듯이 철썩였다. 맨 처음 해안가길을 갈 때는 어느 정도 갈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리가 휘청이는 상태에서 절벽 옆의 길을 마주하자니 거의 울고 싶었다.


물론 다행히도 길의 폭이 어느 정도는 있긴 했지만 매서운 바람과 옆만 바라봐도 아찔한 그 길을 보고 있자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날아갈 것 같았다. 거의 울기 직전으로 이 길은 너무 위험하다고 소리를 지를 때쯤 짝꿍은 손을 잡아주며 안심시켜 줬지만 이미 겁을 잔뜩 먹은 나는 이렇게 가다간 이틀 남기고 죽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미쳤다. 올레도 중요하지만 혹시 모를 사고보다는 내 안전이 더 중요하니까 앞으로 상황을 봐서 해안길은 우회하자고 했다. 마침 조금 더 지나가보니 어떤 길은 태풍이 오기 전에 미리 통행금지 테이프를 붙여놓았고 우리는 지도를 비교해 가며 너무 멀어지지 않는 선에서 리본을 체크하고 최대한 차도 쪽으로 걸었다. 바람만 많이 불지 않았다면 너무 아름다웠을 길인 것 같은데 좀 아쉬워지기도 했다. 


특히 돌영전에 들어설 때의 바위들과 풍경은 진짜 장관이었는데 그래도 아름다운 바다를 며칠간 즐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비가 오는 해안가는 위험하니 풀워킹으로 내리 걸었는데 화살표가 드디어 마을로 향할 때 너무 기뻤다. 눈도 못 뜰 것 같은 바닷바람에서 드디어 벗어난 게 행복했다. 역시 안쪽으로 걷기 시작하니 바람 불어 따갑던 눈도 괜찮아지기 시작했지만 말도 안 되게 그 순간 비가 오기 시작했다. 걷기 전부터 짝꿍과 나는 태풍 행동강령을 미리 만들어 놓고 우비도 준비해 놓았는데 비가 떨어지자마자 착착 비 맞을 준비를 했다. 


몇 주 만에 맞는 비인지 처음엔 시원하다고 생각할 무렵 우린 수산봉에 도착했다. 산을 정말 싫어하는 나이지만 이제 제주도에서 마주치는 봉, 산, 오름등은 날 무뎌지게 만들었다. 하루 전부터 코스에 오르막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은근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제는 그냥 올 테면 와봐라 하는 체념일 수도 있다. 

이 자연 앞에서 내가 화를 내봤자 이 산이 나를 위해 쭈그려 납작해주지도 않을 건데. 어쩌겠나. 내가 입 닥치고 올라가는 수밖에. 


비도 오고 점점 몸은 축축하고 우비 때문에 땀이 더 나는 상황에서 수산봉을 오르기란 쉽지 않았다. 내일이 마지막이라는 생각과 모든 피로감이 한꺼번에 겹쳐 계단 하나하나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진짜 내일 이후로 다시는 보지 말자. 제주도의 모든 산, 봉, 오름들아. 적어도 산은 비를 피를 피하기에 최적의 장소긴 했었고 수산 저수지도 지나가며 마을 쪽으로 다시 진입하기 시작했다. 가는 길엔 편의점을 들렸는데 우리의 모습을 본 편의점 사장님은 '이런 날씨는 올레길에 걷기에 좋지 않은데'라며 안타까워하셨고 나는 '저희 이미 반 이상 걸었어요!'라고 웃으며 화답했다. 내가 봐도 우리 둘은 말리고 싶게 생긴 커플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엔 우린 누가 말려도 하고 싶은 대로 할 것 같은 커플이기도 하다. 


길을 걷다 보면 가끔 멍 때리면서 하염없이 걷는 구간이 있는데 그때쯤엔 유적지나 마을, 카페등이 나온다. 우리도 마침 비가 세게 오기 시작할 때쯤 함파두성, 항파두리 유적지에 도착했다. 그것엔 포토스팟으로도 딱 좋을 꽃밭이 나오는데 비에 잠겨있는 수준이었던 우리는 예쁜 풍경을 지나가야만 하는 게 좀 아쉬웠다. 이 꽃팥에서 사진 좀 건져야 하는데 싶다가도 핸드폰이라도 꺼내는 찰나에 얼굴을 때리는 비가 오니. 이건 그냥 가라는 소리다. 어서 중간 스탬프를 찾아내자 하고 도착했지만 비가 또 거세게 오기 시작해 스탬프는 거의 보이 않을 정도로 젖어서 아쉬웠다. 바로 옆 정자에서 겨우 쉬긴 했지만 이 쏟아지는 비를 보고 오늘내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유적지를 빠져나오는 길은 사실 멀쩡한 길이었는데 또또 방심한 나는 작은 돌을 헛디뎌서 오른쪽 발목이 제대로 꺾였다. 


이번건 제대로 삐었구나 생각도 들고 비오 오는데 그대로 길에서 주저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짝꿍은 내 상태가 어떤지 가만히 내 옆에서 기다려주었고 지끈한 발목을 두고 걸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걸어야만 했다. 끝내야만 했다. 짝꿍에게 부탁해서 가방 속 발목보호대를 다시 찾았다. 더 이상 삐끗할 수 없게 고정이라도 해놓는 게 나의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래도 발목 보호대를 바로 한 덕분에 내 발목은 조금 괜찮아지긴 했지만 비 오는 날의 부상은 너무 끔찍하다. 흙이 잔뜩 묻고 비에 젖은 양말을 벗어 빗속에서 보호대를 차는 나는 다시금 이 올레길의 힘듦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짝꿍은 꾸준히 내 손을 잡아주며 날 응원해 주었고 내가 넘어져도 나를 위해 기다려주고 손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거에 살짝 코가 시큰 거렸다.


중간에 숲길도 살짝 통과하고 굽이 굽이 있던 동네의 골목들을 통과하다 보면 광령 1리가 나온다. 더 이상 제주시에서 아주 멀지도 않고 하늘을 보면 비행기가 내 머리 위로 배를 보이며 날아가는 곳이다. 진입부엔 광령 초등학교도 있고 작은 동네이지만 아이들이 많은 것 같아 포근한 느낌이었다. 스탬프를 찍으러 가기 전 우선 밥을 먹기로 하고 난 족발 정식을 먹었다. 우선 마을 먹으니 한결 피로가 내려간 것 같기도 하고 짝꿍은 젖은 양말도 이참에 갈아 신자며 부추겨서 밥을 다 먹고 양말도 갈아 신었다. 이미 젖어있는 신발에 양말을 다시 신어도 젖긴 하지만 잠깐의 마른 순간도 필요하긴 하다. 스탬프를 찍고 나서는 우리가 점찍어둔 북카페에 가보았으나 이미 만석이었다. 점심 직후라 사람들이 다 자리를 차지했고 책도 둘러보고 싶었지만 가방에 우비에 둘 다 너무 튀는 우리는 좁은 카페에 있기는 힘든 조건이라 아쉽지만 카페를 나왔다.


대신 그 옆에 작은 갤러리도 구경하고 그릇가게도 들려서 구경했다. 특히 그릇가게는 너무 고급지고 예뻐서 하나 사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일 하루 걷다가 가방에서 깨질 상상을 하게 되니 자연스레 포기하게 되었다. 진짜 나중엔 차를 렌트해서 캐리어를 끌고 제주도 올 거다! 다시 북카페를 서성여봤지만 역시 자리는 나지 않아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카페를 찾아 지금 앉아있다.


이 모든 여정이 내일 하루면 끝난다니 말이 되는 걸까. 우리의 호기로운 올레 여정을 태풍 카눈과 함께한다는 게 참으로 송구스럽지만 산티아고 까미노도 정확히 이랬다. 비 오는 날이었다. 내일의 우리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우선 소맥은 필수다. 다음날 안 걸어도 되니 취할 때까지 마시긴 할 거다. 카페 창문으로 비가 다시 내린다. 


비야 마음껏 와라. 그리고 내일 오지 말아 줄래? 눈치 있게 우리의 마지막은 즐기게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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