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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Oct 28. 2022

그는 내 첫사랑이 분명하다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켰는데 남편이 살짝 다가와서 물었다.

"내 얘기 쓰냐?"

"안 써. 안 써. 걱정 마. 자기 얘기 쓰게 되면 허락받고 쓸게."

"허락 안 받아도 돼. 쓰지 마~"

쓸 생각 없었는데 쓰지 말라니까  쓰고 싶어 진다. 손가락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 남편 이야기 말고 내 첫사랑 이야기를 쓰자. 이것은 첫사랑 이야기라는 걸 분명히 밝혀둔다.




그 친구와 나의 인연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였다. 당시 교장선생님의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교육지침(?) 인해 5학년 같은 반 아이들이 6학년 때도 그대로 같은 반이


교장선생님의 예상대로 친구들은 졸업 후에도 친하게 지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는 모임에 나가지 않다가 스무 살쯤에 모임에 나갔다. 모임이 끝나고 밤 12시에 나왔는데 택시를 잡을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 친구와 내가 같이 서 있었다. 모임 장소였던 신촌에서 우리 집이 있던 아현동까지 40분 정도를 함께 걸었다. 빠르게 걸었다. 그 친구나를 집 근처 큰길까지 데려다주고 또 어디론가 놀러 갔다. 이때는 좀 날라리, 노는 아이 같아 보여서 별로였다.


그 후로 몇 년을 모임에 나가지 않다가 스물여덟 살쯤에 모임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이야기를 해 보니 생각보다 재밌고 반듯한 친구였다. 그 친구 포함 몇 명이 자주 어울렸다. 자주 만나는 친구들 중에 그 친구와 나만 사귀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둘이 자주 만났다. 주말이면 한강 고수부지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고 서울 근교로 놀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새 그 친구다른 어떤 친구보다 한 남사친이 되어 있었다. 놀러 다닐 때 차 안에서 내 지난 연애사를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만큼 다. (나중에 매우 후회한 부분이다) 고민이 생기면 그 친구와 상의했다.


일 년쯤 지났을 때, 즐겁게 놀고 헤어진 후에 그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금방 헤어졌는데 또 보고 싶다...

아, 이건 아니다. 난 그냥 친구이고 싶었다. 그에게는 내가 그동안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지켜왔던 연애의 첫 번째 조건인 '강렬한 이끌림'이 없었다. 다음날 카페에서 만나 조금 어정쩡한 거절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어색한 사이가 됐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나기는 해도 둘이 만나지는 않았다. 친구들은 우리 둘이 잘 어울린다고 하며 연결해 주려고 애썼다. 당시 그 친구는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분명 나 보다 좋은 조건이었는데 그놈의 강렬한 이끌림이 뭔지.


그렇게 일 년쯤 지난 , 그 친구가 호주 시드니로 유학을 떠난다고 연락을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과 차를 정리하는 등 순식간에 모든 걸 해치웠다.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나를 불러 밥을 사줬다. 그리고 가버렸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우리는 가끔 메일을 주고받았다. 친구는 호주 생활에 매우 잘 적응했다. 처음에는 하숙집에 머물다가 돈을 아끼려 셰어하우스 거실에서 살고 있으며 어학원에서 1등을 할 만큼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새벽에 맥도널드 청소를 해서 번 돈으로 서핑보드를 사서 배우는 중이라고도 했다. 대학원을 마치고도 호주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일이 바빠 그 친구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가끔 술 마실 때 생각이 나긴 했지만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에 나는 다니던 회사보다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을 데려오고 싶었던 실장의 계략으로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았다. 너무 억울해서 자다가 이불 킥을 했고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법적 대응이라도 해야 하나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었다. 힘든 일이 생기니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메일을 보냈더니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통화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친구가 더 이상 마음 다치지 말고 호주로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모든 억울함을 던져버리고 호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시드니 공항에서 만난 그 친구는 한국에서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를 기르고 살이 빠져 건강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매일 만나던 동네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우리는 시드니 곳곳을 여행하고 시드니에서 비행기를 타고 멜버른에 가서 버스투어를 하기도 했다. 그 친구가 짜 놓은 여행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친구는 가는 곳마다 내가 주인공인 사진을 열심히 찍어 주었다. 억울한 퇴사라는 흑역사가 만들어준 최고의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밤마다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고 한 방, 심지어 한 침대에서 잤다. 나는 '무슨 일 생기면 어쩌지? 뭐 여기까지 왔는데 받아들여야겠지'라는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2주가 지나도록 매우 잘 잤다. 쿨쿨 잘 잤다. 뭐지? 이젠 나한테 마음이 없나? 마음이 없는 사람치고는 너무 잘해 는데? 혹시 게이였나? 무슨 문제 있나? 날이 갈수록 의혹이 커져갔다.


내가 돌아가야 할 한 달의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의혹을 해결해야 했다. 사실 진짜 마음은 함께 여행 다니면서 그 친구가 듬직하고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친구의 마음을 확인하기로 했다.


확인 결과, 그는 매우... 남자였다. 나한테 스킨십을 시도했다가 다시는 못 볼 상황이 될까 봐 걱정한 소심하고 귀여운 남자였다. 결혼을 약속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몇 달 후에 나를 데리고 호주로 다시 갈 생각으로 한국에 왔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는 과정에서 예상 밖의 문제들이 생겼다. 그는 호주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고 우리는 한국에서 살기로 했다. 열두 살에 처음 만난 우리는 서른두 살에 결혼을 했다.




그와 결혼한 지 18년이 지났다. 막내딸이 물었다.

"엄마랑 아빠 중에 누가 먼저 좋아했어?"

나 : 아빠랑 엄마랑 친구였는데 아빠가 엄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어

 : 난 그런 기억 없는데? 엄마가 아빠 보고 싶다고 호주로 찾아왔잖아. 세상에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열 시간을 비행기 타고 왔겠어?


사람이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과거 기억을 왜곡시킨 다더니... 하긴, 나도 왜곡시킨 것이 있다. 그와 친구 시절 나불나불 털어놨던 나의 연애사를 가지고 그가 놀려댈 때면 난 이렇게 외치곤 한다.

"무슨 소리야? 난 자기가 첫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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